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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 공식 시나리오 [크럼블 데이즈] 약 스포일러

 

Scene Op. 언제까지 그렇게 굴 거야?

장면 플레이어 : 카를라 올리베이라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옆 침대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똑같이 침대에 누운 채 하염없이 비가 오는 창 밖만 바라보고 있는 내 친구, 아오바 미후유가 있다. 사실 미후유가 창 밖을 내다보는 건 그리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미후유는 멍하니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있는 경우가 왕왕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지금의 이 상황이 어색한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 

 

“미후유! 너 나랑 얘기 좀 해.”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미후유의 침대 한쪽에 걸터앉았다. 일부러 힘 주어 털썩, 하고 앉은 탓에 침대 한 구석이 푹 꺼지며 매트리스가 가볍게 흔들린다. 그 때문인지, 혹은 내 말을 들었기 때문인지 미후유는 조용히 고개를 내 쪽으로 돌렸다가, 잠시 동안 날 뚫어져라 -그러나 무표정하게- 바라보더니, 

 

“...딱히 할 말 없는데.”

 

라며 다시 창가로 고개를 돌려버린다. 

 

그래, 바로 저런 모습이 날 속 터지게 만드는 것이다! 미후유가 좀 맹한 구석이 있기는 해도, 이렇게까지 날 대놓고 무시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미후유는 언제나 내가 말을 걸면 나름의 대답을 -비록 반 박자쯤 늦을지언정- 돌려주었다. 우리가 속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눌 만큼 친해진 ‘슈라 바라’ 사건 이후로는 더더욱 그랬고. 

 

그런데 지금은 내가 대화하자고 이야기를 해도, 그걸 대놓고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답답하지 않고 배기겠는가? 나는 더 이상 이 이상한 긴장 상태를 지속하고 싶지 않았다. 이틀만 더 이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난 답답해서 돌아버릴 게 분명했다. 이 병실은 우리 둘밖에 없는 2인실이고, 퇴원까진 아직 며칠 남았으며, 달리 할 일이 없다…그런 이유도 물론 있다. 미후유가 나랑 놀아 주길 바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제일 중요한 건 나와 미후유가 친구라는 점이다. 그것도 아주아주 친하고 소중한 친구. 절대로 이대로 멀어지고 싶지 않은, 붙잡아야만 하는 친구!! 

 

“미후유 너, 언제까지 그렇게 굴 거야?”

 

그래서 난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미후유에게 쏘아붙이듯 말했다. 이건 일종의 최후 통첩 같은 거였다. 도대체 네가 왜 그러는지 난 잘 모르겠거든. 그러니까 불만이 있으면 말로 해. 대화를 해야 문제가 풀릴 거 아냐. 미후유의 눈을 바라보며 눈빛으로 그리 이야기했다. 나에 대해 잘 알고 있을 미후유라면 분명히 알아들었을 것이다. 설마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이야기하지 않으려 들겠어? 

 

“...그건 내가 할 말인데.” 

 

평소보다 더 긴 침묵 후에 미후유로부터 돌아온 답의 첫머리. 기대하던 답변이 아니었던 탓에 나는 어? 하는 멍청한 소리만을 입 밖으로 내뱉었고, 미후유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언제까지 그렇게 굴 건데, 카를라.”

 

그렇게 한 마디를 툭 던져놓고, 미후유는 그대로 침대에서 일어나 병실 밖으로 나섰다. 더 이상 대화를 계속하기 싫다는 듯한 태도. 나는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병실로 돌아온 미후유는, 심지어 한 술 더 떠서, 침대 사이의 커튼을 쳐 버리기까지 했다. 

 

그날 내내 고민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침대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머리에 열이 오를 때까지 팔짱을 낀 채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미후유가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함이었다. 답은 금방 나오지 않았다. 결국 나는, 머리 꼭대기에 정말로 불꽃이 피어올라 -샐러맨더라는 것은 이럴 때 가끔 불편하다- 간호사 언니가 물을 뿌려줄 때에서야 고민을 그만둘 수 있었다!

 

나는 새 시트가 깔린 침대에 대자로 벌렁 드러누웠다. 반복되는 무늬의 단조로운 흰 타일만이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창유리를 때리는 빗소리가 고요한 병실에 울렸다. 

 

언제까지 그렇게 굴 거냐고? 

 

문제를 낼 거면 힌트라도 좀 주던가. 쭉 뻗은 두 손으로 주먹을 꾹 말아 쥐며, 나는 찬찬히 이곳 병실에 들어오기까지의 일을 되짚어 나가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엇이 미후유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지 찾아내기 위함이었다.

 

-

 

Scene 01. 지켜내기 위해

장면 플레이어 : 카를라 올리베이라

 

사이렌이 요란하게 울리고 있는 UGN N시 지부. 이곳저곳에서 폭발음이 들려오고 있다. FH의 습격을 받아 전투가 일어난 지부의 복도를 가로지른다. 

 

멀리서 머리를 노리고 들어온 공격을 고개를 조금 틀어 가볍게 흘려 낸다. 10미터가 조금 안 되는 거리에 위치한 적을 향해, 바람을 가르듯 혹은 바람과 한 몸이 된 듯 매끄럽게 미끄러져 들어간다. 가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불꽃을 둘러 새하얗게 달아오른 주먹을 적의 몸통 한가운데에 꽂아 넣는다. 십수 년 이상을 연습해 온 리버 블로우. 내지르는 주먹의 위력만으로도 무시할 것이 못 되는 공격은, 꺼지지 않는 불꽃-이터널 블레이즈-의 열기에 힘입어 가공할 파괴력을 내보인다. 공격을 몸으로 받아낸 FH에이전트는 저항 한 번 못 한 채 자리에 쓰러지고 만다. 

 

지부 방어작전은 기습을 감안하면 굉장히 수월하게 풀려나가고 있다. 공격해 오는 FH 에이전트들은 UGN이 메뉴얼에 상정한 대로 행동하고 있고, 그다지 강하지도 않았다. 딱 하나 거슬리는 것이라면, 수가 많다는 점 정도일까.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주변을 둘러본다. 멀지 않은 곳에서 다른 에이전트가 지부로 진입을 시도하고 있다. 

 

그렇게 둘 것 같아?

 

여기는 내가 지켜야 할 나의 지부다. 엄하지만 따뜻하신 지부장님이, 친절한 에이전트 분들이, 껄렁해 보이지만 속내는 착한 칠드런들이, 그리고 내 친구가 있는 곳이다. 한 명도 빠짐없이 소중한 사람들이다. 요컨대 이 지부는, 비일상의 내가 나로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장소인 셈이다. 그리 쉽게 내줄 수 있을 리 없다.

 

그런 생각으로 다시 한 번 자리를 박차고 달려나간다. 진입을 시도하던 FH 에이전트는 달려드는 나를 눈치채고 한 발짝 물러선다. 큰 덩치의 키마이라답지 않은 날렵한 동작으로 주먹을 피하고, 자세가 흐트러진 틈을 타 공격을 찔러넣는다. 아, 이건 늦었다.

 

퍽, 순간적으로 시야가 붉게 물든다. 날아갈 것 같은 의식을 간신히 붙잡고 땅을 디딘 채 바로 선다. 붉어진 시야는 수 초 내로 복구된다. 레니게이드에 의해 부서진 몸이 강제로 복구되는 감각. 몇 번을 겪었지만 아직 익숙하지 않다. 오버드라면 다들 알겠지만, 리저렉트는 굉장히 복합적으로 기분 더러운 행위다. 당했다는 생각에 자존심이 상해서, 죽었다 일어나는 생소한 느낌 때문에, 그럼에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탓에…

 

이마에 흐른 피를 소매로 닦아내고, 입 안에 고인 피를 투 하는 짧은 소리와 함께 뱉어낸다. 이죽이는 웃음을 짓던 에이전트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든다. 그대로 손을 뻗어 그의 멱살을 잡고 이야기한다.

 

“왜 그런 표정이야, 리저렉트 처음 봐?”

 

멱살을 잡은 손아귀에 그대로 열기를 흘려보낸다. 강철도 녹여내릴 만큼 강렬한 불꽃이 휘몰아친다. 살이 타는 냄새. 그대로 전투불능이 된 에이전트를 바닥에 던져 버린다. 시선은 여전히 저 멀리, 다음에 처리할 타겟을 찾아 분주히 움직인다. 

 

이대로 몰아쳐서 빠르게 정리할까. 그런 생각으로 꽤 먼 거리를 한 번에 도약한다. 바람을 타고 이동하는 듯한 달리기, 땅을 강하게 딛고 보폭을 넓게 했다. 발이 닿는 지점마다 타이어의 스키드마크가 남는 것처럼,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발자국이 옅게 찍힌다. 발자국으로부터 흰 연기가 한 줄기 가늘게 피어오른다. 

 

-

 

 Scene 02. 그런 건 싫어.

장면 플레이어 : 아오바 미후유

 

아오바 미후유는 전투에서 빠진 채 지금의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섣불리 전투에 뛰어들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스스로의 내면에 아직 정리되지 않은 점들이 여럿 산적해 있는 탓이었다. 

 

그 첫 번째는, 이제는 성향처럼 굳어 버린 습관이었다. 미후유는 자신의 삶에 큰 변화가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았다. 어차피 죽지 못해 사는 삶, 괜한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늘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지냈다. 자신이 선 곳까지 빛이 비칠 때면, 조용히 뒤로 한 발짝 물러나면 그만이었다. 그 빛이 자신을 비추는 일이 없도록. 자연스레 미후유의 곁에는 그 무엇도 남지 않았다. 붙들지 않는 것들은 언제나 흘러가버리는 법이니까. 미후유는 그걸 당연한 일상이라 여겼고, 그럴수록 더욱 죽음과 천국에 집착했다. 그것만큼은 자신에게 온전히 약속된 결말이었으므로. 죽음은 언젠가 자신에게 찾아올 자신의 유일한 친구였기 때문에.  

 

그렇지만 비일상의 세계는 미후유를 가만 놔둘 생각이 없는 듯 했다. ‘슈라 바라’의 사건이 그랬다. 비일상은 마나카를 위협했다. 마나카는 미후유가 유일하게 붙들고 있는 대상이었다. 그것만큼은 내 줄 생각이 없는, 내 것이었다. 고리에 묶인 채 자신을 비추어 오는 스포트라이트를 바라보게 된 상황에서, 물러설 곳 없는 미후유는 자의로든 타의로든 무대의 중심에 섰다. 아이러니하게도, 일상보다 비일상의 세계에 더 먼저 제 발을 들이민 셈이었다.

 

그렇게 마주한 비일상의 사건은 지독할 정도로 끔찍했다. 누군가 다치고 죽는, 그런 것들이 끔찍한 게 아니었다. 그런 죽음은 누구에게든 어떤 방식으로든 찾아오기 마련이고, 자신 역시 그런 결말을 약속받고 있으니까. 정말로 끔찍한 것은, 그들의 행동을,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오버드라는 이들은 서로를 죽일 각오로 물어뜯었다. 제 목숨은 중요하지 않다는 듯 전투에 몸을 던지고, 실제로 몇 번씩 죽음의 목전까지 도달했다가도 이를 악물고 다시 일어섰다. 무엇 때문에 모두들 그렇게까지 열과 성을 다하는지 미후유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자신은 -이미 온전한 사람이기는 진즉 포기했고, 유령과 다름없는 존재라고 여기는 자신은-온전한 오버드조차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우수한 능력의 오버드로서 받고 있다는 기대는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마냥 불편할 뿐이었다. 난 그런 사람이 아닌데. 미후유는 멀리 들리는 폭음을 배경으로 하여, 앉은 자리에서 무릎을 끌어당겨 고개를 묻었다. 

 

중요하지 않은 것은 그냥 놓아 버리면 될 뿐인데, 어째서 그렇게까지 ‘붙잡으려’ 노력하는 건지. 자신과의 괴리를 느낄 때면 늘 속이 거북했다. 그런 이들 곁에 있다 보면 자신마저 이상해질 것 같았다. 그래, 지금 저 앞에서 에서 분투하고 있는 그 아이처럼.

 

‘슈라 바라’ 사건으로 처음 만난 카를라 올리베이라는 참 이상한 녀석이었다. 카를라 올리베이라는 늘 미후유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먼저 말을 걸고 대화를 요구했다. 분명 초면일 미후유를 스스럼없이 대하는 태도가 이상했다. 한 번 보고 말 사람인데, 어차피 스쳐가는 빛처럼 너도 그렇게 가 버릴 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미후유는 늘 그가 건네는 인사를 받아 주었다. 적당히 대화에 응했다. 이상함이 옮지 않도록 한 걸음씩 발을 뒤로 물려 가면서. 

 

카를라 역시 그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적당히 포기할 법도 한 것을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에게 다가왔다. 미후유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면, 두 걸음 앞으로 다가오려는 듯한 행동들을 했다. 도시락을 같이 먹고, 등하교를 함께하고, 집에서 숙제를 같이 하고, 학교가 끝난 다음에 함께 놀러 다니고… 그러면서 그는 미후유를 친구라고 불렀다. 미후유가 그의 행동에 의문을 표할 때마다, 카를라는 그 단어를 답으로 내놓았다.

 

친구. 미후유는 그 단어를 작게 입 안에서 되뇌였다. 처음 들었을 때 만큼 어색한 울림은 아니었다. 너무 자주 들어서 익숙해져 버린 것일까. 혹은 이미 이상함이 옮아버린 걸지도 모르지. 평소였으면 한 발짝 발을 물려 간단히 도망쳤을 일에서 섣불리 발을 빼지 못하고 있는 것 역시 그래서가 아닐까. 미후유는 고개를 들어 다시금 전장을 바라보았다. 

 

어라?

 

방금 전까지 카를라가 있던 자리에는 쓰러진 FH에이전트만이 남겨져 있었다. 그 옆에는 카를라의 것으로 보이는 발자국이 -그가 전력으로 달리기를 할 때면 으레 저런 발자국을 남기곤 했다- 찍혀 있었다. 시선을 돌린 사이 그를 놓쳤음을 인지한 미후유에게 두려움이 엄습했다. 오버드는 쉽게 죽는다. 카를라 역시 까딱 잘못하면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불꽃 같은 그의 성격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강렬하게 타오르는 불꽃은 그만큼 빨리 꺼져버리기 마련이니까.

 

그런 건 싫어.

 

미후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그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멀리서 들려오던 폭음은 점점 가까워지더니 결국 미후유의 바로 옆까지 다가왔다. 진동하는 공기에 얻어맞은 듯한 몸이 아렸다. 그렇지만 미후유는 계속해서 움직였다. 자신 옆에서 타오르던 불꽃의 열기가 사그라져 버리면 또 다시 한기가 찾아올 것을 알았기에, 그리고 그 한기를 지금의 미후유는 버틸 수 없을 것 같았기에 달리고, 또 달려서 전장의 한가운데에 뛰어들었다.

 

언제나 빛을 피해 물러나던 미후유였으나 이제는 스스로 빛날 때였다. 미후유는 레니게이드를 활성화시키고 영역을 펼쳤다. 엔젤 헤일로의 이펙트가 빛을 뿜는다. 눈이 시릴 정도의 푸른 빛을. 

 

-

Scene 03. 돌아가야 하는데

장면 플레이어 : 카를라 올리베이라

 

젠장! 

 

반파된 벽 뒤에 숨어 숨을 돌린다.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주변을 눈으로 훑는다. 적들은 도대체 어디서 이 많은 숫자가 튀어나오는 것인지, 쓰러뜨리고 또 쓰러뜨려도 어디선가 계속 나타나 달려들고 있다.

 

그런 식으로 몇 번이고 계속되는 전투를 버틸 수 있는 오버드 따위는 없다. 이펙트를 사용하는 것은 레니게이드 바이러스에게 스스로를 내어주는 일이고, 그 끝에 예정된 것은 파멸뿐이다. 레니게이드 바이러스에 과도하게 침식된 오버드는 스스로를 잃어버린다. 레니게이드가 돋구는 충동에 따라 행동하는 졈이 되어버린다. 아무리 강한 오버드여도, 거기에 예외는 없다. 

 

어쩌면 처음부터 이들의 목적은 그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에이전트 셋을 잃더라도 확실하게 적 하나를 제거할 수 있으면 목표 달성에는 문제가 없다는 논리. 졈까지도 에이전트로 쓰는 FH가 아니고서야 할 수 없는 발상. 추악한 함정에 보기 좋게 걸려든 꼴임을 깨닫고는 이를 갈았다. 눈치채는 것이 너무 늦어버렸다. 어쩐지 너무 잘 풀린다 싶을 때 의심했어야 했는데. 이런 상태라면 영락 없이 코너에 몰린 꼴이다. 

 

마음에 안 드네…

 

어느 새 자신을 찾아내어 밀려드는 적들을 거꾸러뜨리며 속으로 욕지기를 뱉는다. 머릿속은 이미 새하얘져서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게 된 지 오래다. 할 수 있는 것은 가장 단순하고 원초적인 생각들. 예컨대, 피한다, 때린다, 죽인다, 살아남는다, 와 같은. 본능이 시키는 대로 몸을 움직이며 희미해져 가는 것들을 최대한 떠올린다. 레니게이드 폭주를 최대한 억누르고, 스스로를 잃지 않기 위해서. 소중한 이들에게 반드시 돌아가기 위해서. 

 

몇 년 전 세상을 떠난 가족들을 떠올린다. 졈에 의한 사고였다. UGN은 사건을 수습하고, 진상을 은폐하며 정말 유감이라는 뜻을 전해 왔었다. 비록 다시 만날 수는 없지만 하늘에서 지켜보고 있을 가족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가끔은 다시 만나고 싶어 눈물을 흘리기도 했었던 것 같은데. 복수심…도 가졌던가? 분명하지 않다. 더욱 거세진 불길이 눈앞의 졈을 불태운다. 

 

지부장님의 웃는 얼굴을 떠올린다. 사고 이후 갈 곳이 없어진 아이를 거두고, 오버드로서 알아야 할 것들을 가르치고, 비일상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신 분. 지부장님께 도움이 되고 싶어 훈련에도 열심히 임하고, 칭찬을 받을 때면 괜시리 뿌듯해져서 콧노래를 부르기도 했던 일들이 스치듯 지나간다. 그러니까, 이건 존경심이라고 불러야 하는 거겠지. 분명하지 않다. 큰 상처에 중심을 잃고 기울어지던 몸을 일으켜, 다시 똑바로 땅을 딛고 선다. 

 

이제는 자신에게도 일상이 된 학교를 떠올린다. UGN에서의 생활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 쉽게 깨져버릴 수 있는 평화임은 알았지만 그만큼 즐거웠기에 적극적으로 녹아들고 싶었다. 모두와 수다를 떨고, 수업을 열심히 듣고, 매점에서 간식을 사 먹으면서 웃음지었던 것 같은데. 그러니까, 나는 그런 일상을 지키고 싶은 건가? 분명하지 않다. 주먹으로 벽을 쳐 무너뜨린다. 졈 둘이 그 아래 깔려 발버둥친다. 

 

자신이 매일같이 해내던 일들과 그것을 부지런히 해내도록 한 마음가짐을 떠올린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달리기를 하고, 그 후에는 학교에 가고, 하교한 후에는 체육관에서 운동을 하거나, 지부에서 훈련을 받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임무에 투입되거나… 나, 꽤나 열심히 살았구나. 그런데, 왜 그렇게까지 열심히 한 거였더라? 분명하지 않다. 멀리서 날아드는 공격을 가까스로 회피하고, 레니게이드의 힘을 빌려 단숨에 도약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 떠올리는 것은…

 

번쩍. 순간적으로 내리꽂힌 빛줄기에 생각의 흐름이 끊어진다. 눈앞에 서 있던 적은 빛에 꿰뚫려 신음하는 채다. 빛줄기가 시작되었을 방향을 돌아본다. 그곳에는 한 사람이 서 있다. 눈이 시리도록 푸르게 빛나는 오버드가 서 있다. 내 친구 아오바 미후유가 서 있다. 

 

“미후유 너,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야? 위험하다고, 여기는!”

 

미후유에게 다가가 말한다. 거의 소리를 지르는 듯한 말투. 아오바 미후유는 전혀 물러서지 않고, 특유의 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표정은 평소보다 조금 굳어졌었던가?

 

“...바보 카를라.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야. 완전히 만신창이잖아. 돌아올 생각이 있기는 했던 거야?” 

 

“그거야 당연히…!”

 

“됐어. 우선은 여기서 빠져나가자.”

 

“...응. 앞은 내가 맡을 테니까, 엄호해 줘. 저쪽 방향으로 뛰자!” 

 

급박한 상황, 대화는 나중으로 미룬 채 미후유의 앞에 선다. 돌아가기 위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불꽃을 피워올린다. 등 뒤로는 미후유가 빛을 모으는 게 느껴진다. 서늘할 정도로 푸른 빛이 모여 무기의 형상을 띈다. 

 

-


 

Scene 04. 놓친 것

장면 플레이어 : 카를라 올리베이라

 

여기까지 떠올리고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직 미뤄둔 말들을, 해야 할 말들을 하지 않았다.

 

-

 Scene Ed. 앞으로는

장면 플레이어 : 아오바 미후유

 

“저기… 미후유!”

 

미후유는 음료 팩에 꽂힌 빨대를 문 채로 시선을 돌린다. 그곳에는 커튼을 슬쩍 걷고 자신을 부르는 카를라가 서 있다. 카를라 올리베이라는 솔직하고 알기 쉬운 사람이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그는 딱 봐도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한참 동안 누워 있더니 뭔가 생각하기라도 한 듯한 모양새였다.

 

“말해.”

 

미후유는 시선을 잠시 아래로 내렸다가, 다시 카를라를 바라보며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목소리는 건조하고 조용했다. 카를라는 쑥스러운 듯 머리를 벅벅 긁더니 그대로 고개를 푹 숙인다. 고개를 숙인 채로 큰 목소리로 선언하듯 이야기했다. 

 

“미안해, 미후유!”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실없이 웃으면서 말을 이어간다.

 

“그, 의욕이 앞서서 뛰쳐나가 버린 것도, 그래서 위험해진 것도, 돌아오지 못할 뻔한 것까지… 전부 다 미안해.” 

 

뻔뻔하지도 잘 정리되지도 않은, 솔직하고 투박한 사과의 말들. 그답다면 그다운 사과를 하고서, 카를라는 미후유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잠깐의 침묵. 쪼로롭, 팩 음료를 빨아들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까지 사과하길 바란 건 아니었는데.” 

 

“그렇지만 해야할 것 같았어. 미후유가 걱정했을 테니까. 나한테 물어봤었잖아, 돌아올 생각은 있는 거냐고.”

 

“응, 그랬었지.”

 

“꼭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그래서 무리해 버리고 만 거야. 전부 포기하기 싫었거든. 지부도, 사람들도, 일상도…그리고 너도. 친구니까 말야. 날 구해 주러 그런 데 뛰어들 만큼 소중하고 가까운 친구.”


 

“...그래서?”

 

“고맙다고. 너 아니었으면 돌아올 수 없었을 거야. 붙잡아 줘서 정말 고마워, 미후유.”

 

낯뜨거운 말을 잘도 건넨 카를라는 언제나처럼 씩 웃는 표정이었다. 저런 표정이면 미워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저러는 건가 싶어 얄미울 정도였다. 미후유는 빈 음료 팩을 들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카를라 앞에 섰다. 며칠 전 그의 앞에 섰던 것과 비슷한 구도. 미후유는 그대로 자신의 속에 든 말을 천천히 풀어냈다. 

 

“...제멋대로 다가와서 친구라고 말해 놓고 혼자 가버리는 건 싫어. 멋대로 붙잡아버린 주제에 멋대로 놓아버리는 건 정말 싫어.”

 

“응, 안 그래도 반성하는 중이야. 앞으로는 절대로 그러지 않을게. 걱정하는 일이 없도록 할 테니까…”

 

“진작 좀 잘 하지.”

 

“윽.”

 

카를라는 정곡을 찔린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미후유는 몸을 돌려 쓰레기통에 빈 음료 팩을 던져 넣고는 다시금 카를라 쪽을 바라본다. 표정은 언제나와 같았고, 목소리는 이미 누그러져 있었다. 

 

“나 나갈 건데. 같이 가자.” 

 

“어디를?” 

 

“산책. 너 맨날 이 시간에 나가잖아.” 

 

미후유는 손가락을 들어 창 밖을 가리킨다. 어느 새 비가 그치고 구름이 걷혀, 병실 창문으로 노란 저녁 노을이 비치는 모습. 카를라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환하게 웃으며 미후유에게 달려든다. 그대로 미후유를 격하게 끌어안았다.

 

“기억하고 있었구나? 뭐야, 엄청 감동인데~!” 

 

“친구니까 그 정도는… 근데 나 숨 막혀, 떨어져...”

 

카를라의 팔을 두어 번 툭툭 치며 이야기했지만, 카를라는 미후유에게서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내 미후유는 포기한 듯 팔을 내리려다가, 카를라의 등에 슬쩍 손을 얹는다. 가벼운 포옹.


피하지 않길 잘 했어. 미후유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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