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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 휴식

 

휴직계는 놀랍도록 빨리 나온 편이었다. 아닌 척하면서도 자신에게 흘끗흘끗 동정이나 연민이 어린 시선을 던지는 지부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도윤은 모르고 싶어도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푹 쉬다 오라는 주성의 말을 뒤로한 채로 지부장실의 문을 닫았다. 친구도 잃고, 스승님도 잃었다. 복수는 성공했으나 기억에 남는 것이 없었다. 전투 중에 졈이 될 뻔해서 지부장의 판단하에 의식을 차단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 내색할 수 없는 찝찝함만 커졌다. 어떻게 풀었는지는 도통 알 수가 없는데 답만 맞은 수학 문제를 보는 것 같았다.

 

“가이드, 짐 두고 가.”

“한동안 안 돌아올 텐데.”

“그래도 두고 가.”

 

그렇게 말하곤 책상에 있는 물건들을 하나하나 담던 상자를 냉큼 채간다. 완전 도둑놈이 따로 없었다.

 

“빨리 줘. 비행기 시간 늦겠다.”

“어차피 오늘 아니잖아.”

“그건 또 어떻게 알았대. 내 핸드폰 마음대로 들어가지 말랬지.”

 

고집부리는 애새끼도 아니고. 태어난 지 7년 정도밖에 흐르지 않았으니 애가 맞기는 한가. 대연이 상자에 가지런히 담았던 것을 책상에 우수수 쏟았다. 그리고는 귀신같이 전에 있던 장소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차곡차곡 물건들을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 언젠가 인형 뽑기에서 뽑았던 인형도, 모니터 옆 벽에 아무렇게나 붙여놓았던 지부 사람들의 포스트잇 편지도, 서랍장 깊숙한 곳에 소중히 간직해놓았던 사직서도. 아니 저기 넣어둔 건 또 어떻게 안 거지.

 

“아, 이건 가지고 갈게.”

 

그렇게 말하고선 정리가 끝난 뒤에 서랍에서 사직서를 쏙 빼간다. 저건 이제 10초쯤 후면 파쇄기에 갈려서 한낱 종이 쓰레기로 전락할 것이다. 이번엔 꽤 열심히 쓴 거였는데, 괜히 아까운 마음이 들어 도윤은 짧게 혀를 찼다.

 

“니힐 명령이고.”

“사직서 없애버리는 거? 아니면 내 짐을 다시 풀어서 원상복구 시켜놓는 거?”

“둘 다.”

 

이 지부의 지부장인 주성은 그렇게 안 보여도 잔정이 많았다. 분명 자신에게 돌아올 곳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서 그리했을 것이다. 기숙사를 나가 자취를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살던 방을 그대로 비워놓은 것도 그런 이유 중 하나였다. 물론 말로는 ‘너 어차피 여기서 일하느라 집에 못 가잖아.’라며 놀리는 투긴 했다만.

 

 

“진짜 효율적이지 못하네. 아 설마 비상시에 와서 바로 일하게 하려고 그런 거야?”

“42% 정도는 그런 이유라고 생각.”

“뭐야, 그 애매모호한 수치.”

 

도윤은 결국 백팩 하나만 어깨에 둘러메고 사무실을 나왔다. 누가 사이버 전자 강아지 아니랄까 봐 대연이 뒤를 졸졸 따랐다.

 

“도착하면 귤 보내줘.”

“그 말 35번째 하는 건데 다른 말 좀 해보는 게 어때?”

“헤르메스가 한동안 지부 일을 돕기로 했어.”

“아, 하준이 형 고생 많이 하겠네.”

 

하준이 남는다면 아마 그와 늘 함께 다니던 그 레니게이드 비잉도 함께일 것이다. 대연은 탐탁지 않겠지만. 최묘현은 정착을 아직 하지 않아 어떤 지부로 배정될지 알 수 없다. R시 지부장님과 주성이 서로 데려가려고 논쟁을 벌이는 것이 눈에 아른거렸지만, 주성이 질 거라고 생각되진 않았다. 물론 대연은 탐탁지 않겠지만. 에이전트가 되지 않고 일리걸로 활동한다고 해도 예진의 곁에 머물 것 같으니 이 근방에서 활동할 터다. 그럼 필연적으로 C시의 일에 관여하겠지. 다행이었다. 그런 말들이 그의 시름과 걱정을 조금씩 덜어주었다. 도윤은 ‘내가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어.’라는 생각에 늘 몸을 한계까지 몰아붙이곤 했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없어도 이 지부는, 이 도시는, 세상은 잘 돌아갈 것이란 것을 느꼈다. 시원섭섭한 기분이었다.

 

“가이드, 모두한테 인사 안 하고 가?”

“어제 송별회로 3차까지 달리고 다 같이 해장국 먹은 지 2시간 지난 것 같은데. 나한테 아직도 알코올 냄새나는 것 같아.”

“잘 다녀와.”

“오냐.”

 

대연은 검은색 가방을 메고 손을 팔랑팔랑 흔들며 멀어지는 소년을 응시했다. 한참 걸어가던 소년은 인파 사이로 자신의 존재감을 녹이듯 금세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원래 모습은 이제 보여주지 않을 거야?’라는 질문은 하지 못했다. 자신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

 

여름, 바다

 

무선 이어폰으로 시답지 않은 예능 영상 클립을 보며 한참 뛰던 도윤은 러닝머신의 속도를 천천히 줄였다. 그리고 호흡이 원래대로 돌아올 만큼 걷고는 이내 기계를 완전히 멈추었다.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온 곳에서 체력단련이나 하고 있다니, 누가 보면 비웃을 일이었다. 하지만 일을 쉬고 대련하지 않은 지 2주가 지나자 슬슬 몸이 굳는 것 같았다. 책 읽고, 음악을 듣고, 좋은 풍경을 보는 정적인 생활. 거기다 삼시 세끼 꼬박꼬박 챙겨 먹으니 살도 좀 찐 것 같고. 아주 어릴 때부터 몸을 단련하고 삐끗하면 죽었다 살아나는 세상 속에서 살았다. 그래서인지 도윤은 그토록 동경하던 평화로운 일상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느껴졌다. 마치 제 것이 아닌 것 같은 느낌. 이건 이거대로 씁쓸했지만, 현장에 복귀했을 때 둔해진 감각 때문에 만일 실수라도 한다면. 그건 절대로 겪고 싶지 않았다.

 

“왜 그렇게 심각한 얼굴이에요?”

“아.”

 

도윤이 제 볼에 닿는 차가운 감촉에 고개를 들고 포카리 스웨트를 의인화해놓은 것 같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하필 들고 있는 것도 이온 음료다. 누가 보면 홍보대사인 줄 알겠네. 그런 생각을 하며 혼자 웃음을 터트리자, 남자가 갸웃거리다 영문도 모르고 따라 웃었다. 무선 이어폰을 빼고 음료수를 받아 마셨다. 달큼한 이온 음료가 입안에서 목으로, 그리고 뱃속으로 흘렀다.

 

“아니에요. 점심 뭐 먹을지 고민하고 있어서.”

“이 근처에 돈가스집이 새로 생겼던데. 거긴 어때요?”

“아, 좋다. 그런데 아직 맛은 모르죠? 대접해야 할 사람이 있어서 맛없으면 곤란하거든요.”

“같이 오늘 먹어 보러 갈, 아. 그렇군요.”

 

본의 아니게 밥 먹자는 말을 칼같이 거절해버린 도윤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남자는 조금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크게 내색하지는 않았다. 대접할 사람이 이곳에 놀러 오는 사람이라면 회나 해산물, 흑돼지는 어떠냐는 충고와 함께였다. 제주도에서 만나 친해졌는데, 성격도 정말 좋은 사람이다.

 

“놀러 오는 사람이라는 것은 어떻게 알았어요?”

“여기에 친구 없잖아요.”

“... ...”

 

성격 좋은 사람이라는 거 취소. 도윤의 표정은 거의 변하지 않았지만, 어째서인지 남자는 도윤이 조금 뚱해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속으로는 ‘지금 식사 거절했다고 이러는 건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고. 아무도 인정하지 않겠지만, 도윤은 자신이 보기에 너무 알기 쉬운 사람이었다. 대접해야 할 사람이 누굴까. 혹시 일주일에 몇 상자씩 귤을 받는 그 사람인가. 남자의 머릿속에 몇 가지 가설이 스쳤다.

 

“저 빼고요.”

“틀린 말이 하나도 없어서 더 얄밉네요...”

“돈가스집은 나중에 저랑 가요.”

“그래요, 알았어요.”

 

도윤은 땀을 닦은 수건을 스포츠 백에 넣고 캐비닛에 걸어두었던 후드집업을 꺼내 걸쳤다. 캐비닛까지 졸졸 쫓아온 남자가 누군가를 떠오르게 했다. 사이버 전자 레니빙 강아지라던가. 개는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키울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이 좀 더 개같이 굴면 되는 게 아닐까? 손! 하면 손을 얹어줄 것 같은데.

 

“이제 가게요? 아, 샤워실에 아무도 없어요.”

 

몸에 착 달라붙은 셔츠가 찝찝해도 도윤은 샤워실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 더운 여름에 상의를 두 겹씩 입는 이유도 같았다. 그 이유를 꼭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게 묘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혹시 부끄러움이 많은가 싶어서, 라는 말이 되돌아왔다.

 

“괜찮아요. 집에 가서 씻으면 되니까. 가까운 거 알잖아요.”

 

완곡하게, 하지만 단호한 거절이었다. 도윤은 이내 다음엔 자신이 음료수를 사겠다고 말하고 헬스장 유리문을 통과했다. 남자는 혹시 보여주기 싫은 신체의 비밀이라도 있는 걸까, 하는 호기심을 아무도 모르게 내리눌렀다. 모 연예인처럼 젖꼭지가 상당히 아래쪽에 있다든가. 하지만 옷이 달라붙은 모양을 볼 때 그건 또 아닌 것 같은데. 남자는 3초 정도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가 자신의 뺨을 손으로 때렸다. 내가, 방금, 무슨 생각을 한 거지.

 

*

 

제주의 여름은 덥다는 말을 많이 들은 것 같은데, 요즘의 한반도는 어느 도시를 가나 불지옥이라 크게 차이가 나는 느낌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오늘은 놀러 온 거니까 말이지!

 

“놀러 온 거니까 말이지!”

“...예진아, 누구한테 얘기하는 거야?”

“몰라도 돼.”

 

묘현은 그저 부드럽게 웃으며, ‘그래 네가 좋으면 됐지.’라는 눈으로 예진의 머리에서 떨어지기 직전인 선글라스를 다시금 올려주었다. C시에서 제주도를 가기 위해서는 짐을 들고 인천공항으로 이동해서 비행기를 타고 다시 제주공항에 내려 이하 생략의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묘현은 디멘션 게이트를 사용할 수 있는 발로르였다. 그거 하나만으로 모든 번거로운 과정을 생략할 수 있는 사람. 아니, 레니게이드 비잉. 덕분에 에어컨이 틀어진 시원한 C시에서 마찬가지로 에어컨이 틀어진 시원한 이도윤의 제주도 집에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도착했다.

 

“왔어?”

“응, 이게 네 방이야? 생각보다 휑하네.”

“온 지 몇 주 안 되기도 했고. 여기 오래 있을 것도 아니니까.”

 

오랜만에 보는 밝은 노란색 눈과 하얀 머리칼을 보고 예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너무 오래도록 투영한 모습만 봐서 그런지 외려 원래 모습이 어색했다. 싫다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모습을 자연히 드러내게 되었다는 것은 좋은 징조였다. .휴직계를 내고 제주도에 홀로 있을 도윤이 더 땅을 파고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걱정했는데, 그건 또 아닌 모양이었다. 도윤은 놀랍도록 빠르게 마음의 안정을 찾은 것처럼 보였다. 조금 지나칠 정도로 빠르게. 그 말을 일부러 입 밖에 내지 않은 것은 벌집을 들쑤셔봐야 좋을 것이 없다는 동물적인 직감이었다. 도윤은 뒤이어 게이트를 넘어온 묘현에게도 눈인사를 건넸다.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관계인지라 둘 다 내색하진 않아도 묘한 기운이 에어컨 바람과 함께 넘실거렸다. 그러고 보면 도윤은 그가 진짜 ‘최묘현’이 아니란 걸 안 이후론 그의 이름을 입 밖에 낸 적이 없었다. 아마 신경 쓰고 있는 거겠지. 오늘 그를 데려온 것은 물론 디멘션 게이트 때문도 있지만, 서로가 피하지 않았으면 해서기도 했다. 도윤이 돌아오면 필연적으로 마주치게 될 테니까.

 

 

“바다에 갈 거구나?”

“어떻게 알았어.”

“그 꼴을 하고 있는데 모르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튜브에 스노클링용 물안경, 그리고 선글라스. 누가 보아도 물놀이할 생각 만만의 두 사람을 보고, 도윤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자신도 제주도에 도착한 다음 날, 창밖으로 보이는 바다에 짐도 풀지 않고 해안을 걸으며 발을 적셨더랬다. 여름은 역시 바다지. 그렇지 않아도 없는 시간 쪼개고 쪼개서 왔을 테니 편하게 놀게 해주리라 다짐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집에 있는 것들은 편하게 사용해. 일일이 안 물어봐도 괜찮아. 식사는 해산물이랑 고기, 어느 쪽이 좋아?”

 

두 사람은 입을 모아 외쳤다.

 

“고기!”

 

*

 

“예진아아...”

“그래, 알았어. 입을게.”

 

벌써 3번째 제 이름을 애처롭게 부르는 묘현의 손에서 하와이안 셔츠를 받아 껴입은 예진은 벌겋게 익어버린 귀를 응시했다. 제주도에 온다고 샀던 수영복은 넉넉한 셔츠 아래에 대부분 가려져 개시도 제대로 해보지 못했다. 본다고 닳는 것도 아니건만, 묘현은 셔츠를 껴입는 동안 뒤를 돌아 양손을 볼에 대곤 ‘다 입었어?’라고 중얼거렸다. 그런 주제에 자기 몸에는 수줍음도 없는지 새하얀 등을 훤하게 내보인 채다. 괜히 심통이 나 날갯죽지를 손가락으로 찌르니 잘게 쪼개진 근육이 움찔거렸다.

 

“이제 됐지?”

“아니, 나는 너 살 다 탈까 봐...”

 

불꽃을 다루는 샐러맨더한테 씨알도 안 먹힐 핑계를 늘어놓는 게 퍽 귀엽게 느껴져 예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후론 정신없이 노느라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바다에 뛰어들어 시원함을 만끽하고, 물장구를 치고, 중간중간 최묘현을 들쳐 업어 바다에 내던지기도 했다. 에어 매트에 태닝이라도 하듯 누워서 둥실둥실 떠다니자 묘현이 복수랍시고 매트를 슬쩍 뒤집었다.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고 예진은 3번쯤 묘현에게 바닷물 맛을 더 보여주었다. 한참 놀다 해안가를 바라보니 마트에 다녀온다던 도윤이 바비큐 준비를 하고 있었다. 3명이 먹는다고 하기엔 뭔가 바리바리 싸 들고 온 것이 많았다. 눈에 힘을 주고 살펴보니, 고기를 먹는다고 해도 해산물이나 회도 사 온 모양이었다. 부산스럽게 음식을 준비하던 도윤이 이쪽을 봤는지 손을 흔들었다.

 

“바다에 안 들어올 생각일까?”

“밥 먹일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지도...”

 

그때 예진과 묘현은 눈이 마주쳤다. 3초간의 정적 이후, 예진의 눈이 장난스럽게 휘어졌다. 그 시선을 맞받은 묘현도 웃어 보였다.

 

*

 

“예진아, 미쳤어?”

“발버둥 치면 수심 낮은 곳에 떨어져서 다칠지도 몰라~.”

“나 신발! 신발! 운동화야. 젖으면 안 돼!”

“예진아, 걱정하지 마.”

 

그 말을 들은 묘현이 친절하게도 섬세한 손길로 신발을 벗겨 해안가에 가지런히 놓아주었다. 눈물 날 정도로 가증스러운 친절함이었다. 푸른 바다에 햇빛이 쏟아지자, 빛이 이리저리 산란해 눈이 부셨다. 너무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볼 때만.

 

“예진아, 내가 뭔가 잘못한 게 있으면 말로 하자.”

“수영 못해? 건져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혹시 휴직계 내기 전에 백업 파일 정리하다가 실수로 하나 날려 보내서 그래?”

“그게 네 짓이었구나?”

 

아, 내 무덤 내가 팠네. 역시 사람은 끝까지 잡아떼고 모른 척을 해야 하나 보다. 이래서 묵비권이 있는 거다. 절대로 놓아주지 않을 것 같은 예진의 웃음에 도윤은 자신의 운명을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마음의 준비를 끝내니 목소리마저 비장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하자.”

“뭔데?”

“주예진 미쳤, 우풉-”

 

그 날 먹은 바비큐는, 굳이 소금 간을 하지 않아도 충분했다.

(-)

 

여름, 더위

 

“역시 여름이 되니까, 전기세가 장난 아니네.”

 

우편함에서 공과금 명세표들을 빼 온 하준은 소파에 기대어 자신이 납부해야 할 세금들을 하나씩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중 단연 돋보이는 것은 에어컨을 틀기 시작한 이후로 미친 듯이 오르기 시작한 전기세. 돈에 쪼들릴 만큼 일이 없는 것도, 오버드의 다난한 인생으로 보아 노후에 쓸 저축이 필요한 것도 아닌지라 부담이 되진 않지만 아까운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돈으로 차라리 레네드가 좋아하는 간식이나 하나 더 사줬으면 좋아할 텐데. 그렇지만 이 집에서 얌전히... 는 아닌 것 같지만 기다리고 있을 강아지가 간식을 먹다가 더위도 같이 주워 먹으면 큰일이니 이것도 필요한 것이었다.

 

“전기세?”

“응. 기계들은 돌아가려면 전기가 필요하고, 이 전기를 사용하려면 요금을 내야지.”

“헤르메스가 일하는 곳에 있는 그 레니빙은 요금 안 내겠지?”

“그거야... 신드롬이 블랙독이잖아. 자가발전이려나~. 우리 집에도 발전기 같은 게 있으면 좀 편리할지도 모르겠다.”

 

발전기, 발전기하고 중얼거리는 레네드가 의아했으나, 하준은 한글을 막 떼는 어린애를 보는 것처럼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고 보면 최근엔 외국에 나가 있을 때가 많아 레네드가 한글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이참에 국어를 다 뗄 때까지 느긋하게 한국에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오늘도 일하러 가, 헤르메스?”

“응, 하고 싶은 거 하고 있어도 괜찮지만... 집에 얌전히 있어야 해.”

“걱정하지 마. 나 그거 잘해.”

“거짓말하네. 전에 쫓아와서 건물 밖으로 뛰어내렸으면서.”

 

플래너를 만났을 때를 떠올리며 장난스럽게 반박하자 뺨이 퉁퉁하니 부어올랐다. 그 뒤로 한참 동안 ‘그 사람 안 만난다고 했었는데 만났어.’ 내지는 ‘위험할 수도 있었는데 조심성 없어.’ 같은 말을 조용히 꿍얼거리며 불만을 토로했다. 돈가스 사준다고 해놓고 치과에 데려왔다고 억울해하는 꼬마나 밖에 나가는데 자길 안 데려간다고 우는 강아지 같았다. 물론 덩치는 평균 이상의 성인 남성 사이즈긴 하지만 콩깍지란 그런 것이다.

 

“그럼 다녀올게. 냉장고에 귤 있으니까 꺼내 먹어.”

 

하준은 레네드의 배웅을 받으며 현관문을 나섰다. 생각해보니 오늘도 야근이었다. 사람은 한 명밖에 안 빠졌는데 일이 왜 이렇게 많은 거야, 이 지부는. 푸념과도 같은 생각을 하며 한숨을 쉬었으나, 매일 같이 이어지는 야근은 자신이 선택한 거기도 했다. 워라밸! 물론 UGN의 에이전트들은 라이프 쪽이 죄다 박살 나 있긴 했지만, 이건 모두 주말의 휴식을 위해서다. 할당량을 마치면 주말엔 쉬겠다고 주성과 합의를 본 상태였다. 그리고 오늘은 대망의 금요일. 내일은 늦게까지 한숨 푹 자고 레네드와 교외로 기분 전환을 하는 것도 좋겠지. 산책을 제때제때 시켜주지 않으면 스트레스가 쌓일 것이다. 완전히 반려동물의 주인 마인드가 된 하준은 C지부로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

 

“니힐, 일단 보고해두려고요.”

“안 돼.”

“들어보고 얘기해주세요.”

“또 귤을 사달라느니, 너무 더워서 이만 쉬겠다느니, 그것도 아니면 어디를 개조하고 싶다느니 그런 거 아냐?”

“아니에요. 그리고 귤은 냉장고에 많아요.”

 

올라온 보고서에 시선을 떼지 않고 이야기하던 주성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처음 본다면 좀 냉철하게 보일 법하지만 제 눈에는 맹하기 그지없는 얼굴과 마주했다. 문득 공용 냉장고에 들어가 있는 귤들을 생각하고 고개를 까딱거렸다. 대연이 떠나기 전에 얼마나 괴롭혀댔는지 도윤은 무슨 미친 사람처럼 귤 상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처음엔 하루에 한 번, 그 뒤엔 사흘에 한 번, 보내는 양도 무시무시했다. 쌓아놓고 보니 지부 사람들 모두에게 귤을 한 봉지씩 쥐여주고도 상자가 남았다. 지가 예수야, 뭐야. 오병이어도 아니고. 동봉된 엽서에는 작은 텃밭에 귤나무를 심었다는 말도 있었다. 완전 미친놈이었다. 쉴 시간이 필요할 테니 한동안 연락하지 말자고 생각한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서 주성은 도윤에게 짤막한 메시지를 보냈다.

 

[귤 작ㅈᅟᅡᆨ 보ㄴㅐ]

 

“그랬지... 너는 먹는 거 좀 줄이고. 또 기체에 이상 생길라.”

 

그 뒤로 과일을 좋아하는 사람(방대연 포함)들이 적당히 나눠 가져가고, 지부 내에서도 짬짬이 간식으로 먹을 정도의 양을 합의했었다. 그 말을 들으러 온 게 아닌데, 라는 표정으로 눈을 끔벅이는 것을 보고 주성은 다시금 이야기해보라며 고개를 까딱였다.

 

“레네드가 왔었어요.”

“레네드? 최하준 때문에 잠깐 들른 거 아냐?”

“등록되지 않아서 일단 출입을 막았거든요.”

“그래도 신원이 확인되어있으면 잠깐 들어가서 만나고 가도 괜찮긴 한데. 아니면 최하준 내려오게 하든가.”

 

맹한 얼굴에 잠시 불만스러움이 어렸다. 그러고 보니 레네드의 신드롬은 우로보로스와 솔라리스의 크로스 브리드. 우로보로스 신드롬과 레니게이드 비잉은 상성이 일방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니 저 녀석이 날을 세우는 것도 이해는 가는 편이다. 곁에 있으면 자신의 본질을 빼앗기는 느낌이 들 것이다. 아니면 좀 더 본능적인 거부감일 수도 있다. 포식자 앞의 피식자 같은. 다른 사람에 비해 그에게 유달리 틱틱거리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헤르메스는 안 만나고 그냥 갔어요.”

“뭐야, 그럼 왜 온 거야?”

“제 신드롬을 흡수하러 온 것 같던데요.”

“뭐? 네 신드롬을 왜? 키마이라? 아니면 블랙독? 체내에 이상은 없어?”

 

잠깐 제 손을 까딱거리며 신경 반응을 살펴보던 대연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블랙독이라고 답했다. 말에 어조는 없었으나 불쾌한 건 여전했다. 본질이 레니게이드 그 자체인 대연은 다른 오버드보다 레니게이드의 흐름이나 이동에 민감한 편이었다. 그가 슬쩍 와서 집어삼킨 것은 자신의 블랙독 신드롬. 활동에 지장이 있거나 신체에 불편함이 느껴지면 당장에 무력을 행사할 생각이었으나 그건 또 아니었다. 그는 정말 일부분만을 가져갔다. 인간의 몸으로 따지자면 머리카락 정도? 하지만 누가 와서 대뜸 머리카락을 잘라갔는데 하하 웃을 멍청이가 어딨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레네드는 웃으면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곤 재빠르게 사라졌다.

 

“그건 저도 모르겠, ...”

 

-삐익, 삐익

 

말을 끊고 들려온 무전 소리에 대연은 입을 다물고 소리에 집중했다. 저 소리가 의미하는 것은 십중팔구 레니게이드 관련 사건 발생이었다. FH의 테러 및 침입, 오버드의 폭주, 비오버드의 각성, 졈화 등. 주성이 무전의 버튼을 누르자 에이전트의 브리핑이 이어졌다.

 

“XX구 X동 X번지 부근에서 레니게이드로 인한 폭발 확인되었습니다. 규모는 크지 않으며 다행히 화재는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테러일 가능성은?”

“단순 사고일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죠.”

“각성자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지부 내 출동 가능한 화이트 핸드 대기시켜. 옆에 마침 방대연 있으니까 걔랑 같이 가볼게.”

 

오가는 대화를 유심히 듣고 있다가 갑자기 날벼락을 맞은 대연이 슬그머니 도망갈 기색을 내비쳤다.

 

“저 레니게이드가 흡수당해서 평소보다 피곤하고 몸도 잘 안 움직이는 것 같아요.”

“빨리 따라와. 이상 없다고 말한 지 5분도 안 됐어.”

“아 그런데, 니힐. X동 X번지라면.”

“뭐야, 너 아는 사람 살아?”

“헤르메스 집 부근이네요.”

“... ...”

 

주성은 꽤 감이 좋은 편이다. 그리고 그 감은 대개 운보다는 논리적인 사고와 합리적인 이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잠시간 침묵한 그는 무전을 눌러 명령을 다시 내렸다.

 

“화이트 핸드는 필요 없을 것 같고. 가서 최하준 불러와.”

 

*

 

예상대로 사고 발생 장소는 하준의 집이었다. 사고의 원인은 블랙독 이펙트 사용의 미숙함으로 인한 과 전력 쇼트와 에어컨 폭발이었다. 검은 연기가 모락모락 새어 나오는 하준의 집에서는 잘 구워진 레니게이드 비잉과 새카맣게 타버린 에어컨이 나왔다. 폭발의 열기를 고스란히 받은 집안도 난장판이었다. 레네드에게 이유를 듣자 하니 하준이 전기세 고지서를 보고 표정이 좋지 않았으며, 대연처럼 자가발전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한 게 화근이었다. 물론 이 말을 들은 하준이 ‘내가 언제 그랬는데.’라는 말을 몇 번이고 말하다가 나중엔 포기한 듯 ‘그래, 다 내 잘못이다.’라고 중얼거리는 것을 보면, 두 사람의 기억에는 서로 착오가 있는 것 같았지만.

 

결국 하준은 휴일을 고스란히 반납한 채 해당 사고 수습을 해야 했다. 건물 내 두꺼비집이 터지진 않았는지, 전력에 이상은 없는지 확인하고, 더불어 집에 있는 세간살이를 다시 구매하거나 집안 대청소도 하느라 쉴 틈 없이 돌아다녔다. 사고가 완전히 정리된 후, 관련 보고서를 쓸 때 사유에 [은혜를 갚고 싶었던 똥강아지]라고 작성하여 주성의 속을 뒤집어 놓은 것은 또 다른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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