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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ttps://youtu.be/dCB05zXlLAs

익숙하지 않은 적막 속에서 예진은 눈을 떴다. 낡은 선풍기가 끼익 거리는 소음을 내며 위태롭게 돌아가고 있었다. 피부에 와 닿는 열기가 덥고 습했지만 다행히 창밖으로 보이는 해는 산등성이 너머로 지고 있었다. 붉게 물든 하늘이 누군가 물감을 풀어놓은 듯 선명했다.

 

그래서, 나는 왜 여기에서 혼자 자고 있었더라? 졸음이 가신 머리가 천천히 맑아지며 든 첫 번째 의문이었다. 전날 받은 임무가 늦게 끝난 탓인지 1교시 수업에 들자마자 졸음이 쏟아지긴 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 시간까지 깨우는 사람 하나 없이 엎어져 잤단 말이야? 민망함에 양 볼이 붉게 달아올랐지만 창문 틈 사이로 들어오는 노을빛이 그를 가려주었다.

 

“집에 가야지…….”

 

요즘 임무 때문에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늦게 들어가는 일이 잦으니 가족들은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 쪽은 어떨지. 최근 들어 제게도 일감을 몰아주기 시작한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리며 예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 또한 이해하기에, 최대한 그가 맡긴 일은 스스로 해내려 노력하는 중이었다.

 

잠잠해서 더 불안한 휴대폰을 애써 무시하며 짐을 챙긴 예진이 문득 제 뒷자리를 바라보았다.

깔끔하다 못해 누군가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책상이 눈에 밟혔다. 그러고 보니 제 뒤에 앉은 사람이 누구였더라? 왜인지 안개라도 낀 듯 흐릿한 기억에 반사적으로 눈가를 찌푸린 순간, 앞쪽에서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짐은 다 챙겼어?”

 

익숙하지만 기억에는 없는 사람이었다. 백발에 가까운 머리가 노을빛을 받아 연한 주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부드럽게 미소 지은 얼굴과 달리 금색의 눈동자는 낮게 가라앉아 있어서, 그 표정이 몇 번의 연습 끝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쯤 쉽게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평소 즐거울 때 짓던 표정을 나는 잘 아니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머릿속에 떠올랐던 그의 이름이 순식간에 다시 지워지는 바람에 예진은 당황했다.

 

“굳이 기억해내려고 하지 않아도 돼. 일단 짐 다 챙겼으면 나가자.”

“아, 으응.”

 

눈앞에 선 소년의 눈치를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인 예진이 자신의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소년이 양쪽 어깨를 으쓱이더니 앞서 걷기 시작했다. 너무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발걸음에 한결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끼며 예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노을빛 가득한 복도는 방과 후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지나치게 조용했다. 이 넓은 학교에 자신과 소년, 둘만 남은 것 같았다.

 

“선생님들 다 어디 가셨나? 방과 후에 남은 학생들도 있을 텐데…….”

“여기에는 없어. 진짜 학교가 아니니까.”

 

진짜 학교가 아니면 어디인데? 목구멍까지 차오른 질문을 애써 삼키며 예진은 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인지 그의 말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기도 했고, 그런 쓸데없는 질문으로 간만의 대화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무도 없는 복도는 고요했지만 앞서 걷는 소년 덕인지 쓸쓸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저도 알 수 없는 질문이 튀어 나온 것은 그래서였다.

 

“이젠 좀 괜찮아?”

“역시 그것부터 물어보는구나. 음, 솔직히 괜찮다고는 할 수 없지만…….”

 

괜찮아져야지. 그렇게 덧붙이며 웃는 얼굴은 누군가 바늘로 살갗을 콕콕 찌르는 듯 사람을 아리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좋아하는 친구의 이런 표정을 예진은 보기 힘들어했다. 그런데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의연하게 굴었던 것은 누가 가장 힘든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의 솔직한 대답이 기꺼웠다. 소년은 그렇구나, 하며 작게 웃는 예진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너는 힘들지 않아? 요즘 일 엄청 몰아주던데.”

“나도 이제 슬슬 적응기가 끝났다고 생각하시나 봐. 언제까지고 신입으로 남아있을 수는 없으니까.”

 

예진이 부러 씩씩하게 답하며 걷는 발걸음에 힘을 주었다. 기묘한 느낌이었다.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상대와 이리도 익숙하게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 심지어 그 대화 내용도 반절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가능하다면 이 시간이 길게 이어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이 야속하게도, 그들의 발걸음은 어느덧 1층의 출구에 다다랐다.

 

“아, 그러고 보니 기숙사로 돌아가는 거야? 그럼 방향은 같으니까 같이―”

 

무의식중에 내뱉은 말과 함께 시선을 옮기는 순간, 스치는 시야에 들어온 것은 커다란 거울이었다. 학교 건물의 중앙에 세워진 거울 아래에는 ‘용모단정, 품행방정’라는 표어가 붙어있었다. 그 익숙한 글자 뒤에 비치는 모습이 조금 이상했다. 있는 그대로의 저와 달리 본래 소년보다 더 키가 작고, 머리카락 색이 어둡고, 여린 누군가의 모습. 예진의 눈에 어린 당황을 읽었는지 소년이 쓰게 웃으며 예진의 양 어깨를 잡아 부드럽게 밀었다.

 

“나도 적응기 같은 거야. 그래도 선배인데 네게 도움 될 만한 말은 못해주는 게 미안하지만.”

 

소년이 열어준 문고리를 얼결에 넘겨 잡으며 예진이 소년을 돌아보았다. 텅 빈 학교, 노을빛에 잠긴 그의 모습이 어딘지 쓸쓸해 보여 어쩐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제 등을 미는 손길이 한없이 다정하고도 단호해서, 예진은 결국 끝까지 열어젖힌 문 너머로 발을 내디뎠다.

 

“너도 내게 소중한 친구니까, 힘내볼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것과 문이 닫히는 것은 동시였다.

돌아본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

 

 

 

“그 애는 잘 만나고 왔어?”

 

마찬가지로 아무도 없는 교정을 지나 운동장으로 나서자 누군가가 구령대의 난간에 앉아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옅은 베이지색의 머리카락은 빛바랜 금발 같아 보이기도 해서, 여유로운 표정과 더불어 그의 분위기를 묘하게 만들고 있었다. 여전히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소년과 마찬가지로 익숙한 느낌이 드는 사람이었다. 그 애라는 건 아마 소년을 말하는 거겠지. 예진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나름대로 걱정은 되지만, 이런 건 옆에서 누군가 도와준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니까. 우리는 지켜봐 줄 수밖에 없지.”

 

난간에서 가볍게 뛰어내려 예진의 앞에 선 그가 빙글 웃어 보였다. 모처럼이니까 훈련 봐줄까? 지나가듯 던진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선 자리에서 가벼운 모래바람이 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시야에서 모습을 감췄다. 당황한 예진이 팔을 들어 옆에서 날아오는 공격을 막은 것은 순전히 본능에 따른 결과였다.

 

“이런, 수화는 하지 말고. 이펙트를 사용하면 제대로 봐주기가 어려우니까.”

 

가로막힌 공격에도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여유롭게 발을 걷은 그가 제 옷의 먼지를 툭툭 털어냈다. 그 후로는 잠시간 말 없는 대련이 이어졌다. 오로지 신체만을 사용하는 움직임은 평소보다 단조로웠지만 몸의 감각을 일깨우기에는 걸맞았다. 그래서 훈련에 이펙트를 사용하지 않는 시간이 꼭 들어갔었지… 문득 떠오른 기억에 예진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물 밑으로 가라앉기라도 한 듯 흐릿하기만 한 기억은 답답했지만 불안하지는 않았다. 예진은 그것이 아까 만난 소년과 눈앞의 사람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빈틈.”

“……!”

 

아주 잠깐 다른 생각에 잠겼을 뿐인데, 그 잠깐의 틈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옆구리에 날카로운 공격이 꽂혔다. 뒤로 나가떨어진 예진이 민망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힘 조절을 했는지 아프지는 않았지만 꼴사나운 모습은 역시 조금 신경이 쓰였다.

 

“그래도 열심히 했나 보네, 저번보다 많이 좋아졌어.”

 

미소 띤 얼굴의 그가 손을 내밀었다. 눈앞의 남자는 어딘가에 정착하는 성미가 되지 못해 제 사무실을 두고도 멀리 돌아다니곤 했다. 그래서인지 간만에 부딪힌 대련에서 받은 칭찬은 생각보다 더 기껍고도 쑥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지금 보는 것도 꽤 오래간만이지 않나? 무의식중에 떠오른 의문을 뒤로 하고, 그가 내민 손을 맞잡은 예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차림을 정돈했다.

 

“요즘은 어때? 일에는 많이 익숙해진 것 같던데.”

“그냥, 시키는 대로 열심히 하고 있어요.”

“그래도 잠입 임무는 좀 더 연습이 필요하겠더라.”

 

저번에는 어떻게든 넘어갔지만. 장난스럽게 웃는 모습에 예진도 따라 미소 지었다. 처음으로 받았던 잠입 임무는 여러모로 불안한 점도 많았으나 그와 함께한 덕분에 무사히 끝마칠 수 있었다. 아니, 그걸 정말 ‘무사히’ 끝냈다고 해도 좋은 걸까. 저도 모르게 어두워지는 표정을 봤는지 그가 여상한 말투로 말했다.

 

“알고 있겠지만 오버드의 수명은 보통 짧아.”

“……?”

“다들 기본적으로 아는 상식이지. 하지만 그게 이별에 익숙하다는 건 아니니까.”

 

그의 시선이 어느덧 해가 완전히 모습을 감추고 어둑해진 하늘로 향했다. 푸른빛과 붉은빛, 보랏빛이 한데 섞인 하늘은 오묘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마치 이야기 속에나 등장할법한 풍경 아래서 그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길게 늘어진 그의 그림자 또한 하늘거리며 움직였다.

 

“아마 네게도 누군가와 이별할 순간이 멀지는 않을 거야.”

“…….”

“힘들면 잠시 쉬어도 돼. 아예 도망쳐도 괜찮고.”

 

그가 예진의 쪽으로 슬쩍 몸을 틀며 교문 밖으로 향하는 길을 가리켰다. 이제 슬슬 다음으로 넘어갈 시간이야. 예진의 발걸음이 그의 안내를 따라 교문 쪽으로 향했다. 그가 한 말에 대해 묻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질문은 말로 이루어지지 않고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그런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웃어 보인 그가 장난스럽게 예진의 등을 툭, 밀었다.

 

“익숙해질 필요는 없다는 뜻이야.”

 

마음껏 슬퍼하고, 마음껏 아파하고, 마음껏 울고.

준비된 이별이라는 건 없으니까.

 

떠밀린 발걸음이 교문 밖을 내디뎠다.

 

 

 

***

 

 

 

교문 밖은 어째서인지 숲길이었다. 녹음이 푸르른 숲은 보기만 해도 상쾌해지는 기분이었지만, 예진이 기억하기로 제가 다니는 학교는 도심 가운데에 위치한 평범한 학교였다. 심지어 나뭇잎 사이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하늘은 안쪽으로 걸을수록 점점 밝아져 오는 느낌마저 들었다. 역시 이건 꿈인 걸까? 그런 의문이 떠오르기가 무섭게 나타난 것은 널따란 공터와, 그 가운데에 놓인 커다란 테이블이었다.

 

“이제 왔냐?”

“안녕하세요, 이아쿠스.”

 

테이블에 앉은 사람은 겨우 두 명이었다. 한 명은 연회색 머리카락을 대충 묶은 채 서툰 손짓으로 차를 내리고 있었고, 그 맞은편에 앉은 청년은 어딘지 멍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길게 기른 분홍빛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 보이는 보라색 눈동자가 선명했다.

 

“이거 컨셉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뭐 그런 거냐? 왜 내가 하필 모자 장수인데?”

“딱히 정해져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니힐이 분식집 사장이라 그런 거 아니에요?”

 

저들끼리만 통화는 대화를 나누던 둘이 머뭇거리는 예진을 향해 자리에 앉으라는 듯 눈짓했다. 하지만 의자가 없는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제 근처로 고풍스러운 무늬의 의자가 불쑥 솟아올랐다. 놀란 예진의 앞에 연회색 머리카락의 남자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투덜거리면서도 할 건 다 하네요.”

“그럼 애 계속 세워두리? 확 너를 의자로 만드는 수가 있다.”

 

투닥거리는 대화를 뒤로 하고 내려다본 찻잔 속에는 제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연한 찻물은 충분히 우리지 않았는지 맹물에 가까워 보였지만, 그가 이런 것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은 예진도 잘 알고 있기에 미처 막지 못한 잇새로 웃음이 튀어나올 뿐이었다. 다구를 정리한 남자가 자리에 앉고, 한동안 테이블 위는 편안한 침묵 아래 홀짝이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그런데, 저는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침묵을 깬 것은 분홍빛 머리카락의 청년이었다. 갓 약관에 들어선 외모와 달리 의문을 가득 담고 기울어진 고개가 마치 어린아이의 것 같았다. 무구한 물음을 담은 목소리가 고저 없이 울렸다.

 

“그 사람은 가이드보다 자기 신념을 택했어요.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알면서도. 그래도 가이드는 그를 소중하게 여기는 거예요?”

“사람 마음이라는 게 원래 그래, 나눠도 꼭 나머지가 남거든. 맞아떨어지는 경우가 없다.”

 

가볍게 답한 남자가 예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무심한 표정 아래 저를 신경 쓰는 기색이 익숙해서, 예진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마주 보았다. 이내 픽 웃는 소리와 함께 그의 손가락이 가볍게 테이블 위를 두드렸다. 직후 제 앞에 솟아난 디저트 그릇에도 예진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렇게 멀뚱거리지 말고 너도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봐라. 아님 요즘 고생했으니 쉬기라도 하든가.”

“네에……. 잘 먹겠습니다.”

 

쿠키는 미묘한 식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맛은 나쁘지 않았다. 이제는 예진도 알았다. 자신이 가진 근본적인 의문에 대한 답은 그 누구도 알려줄 수 없음을. 그것은 평생 아무도 해결하지 못할 난제이며, 이 비일상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끌어안고 있는 고뇌인 것이다. 결국 스스로 답을 내지 못하면 안 되었다. 어쩌면 그것은 처음부터 답이 없는 문제일지도 모른다.

 

“지부장님은 어떻게 이겨냈어요? 누군가랑 헤어질 때.”

“이기긴 뭘 이겨. 싸우냐? 애초에 해결한 적도 없고.”

 

뚱한 표정의 그가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팔짱을 꼈다. 툭 내뱉은 말과는 달리 무언가 말하고 싶어 하는데도 표현할 길이 없어 퍽 곤란한 듯 보였다. 한참을 고뇌하듯 얼굴을 찌푸린 그가 이내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냥 지나가는 거지. 내가 어떻든 시간은 흐르니까.”

“…….”

“너도 아마 겪게 될 거야. 네 친구나 가족, 혹은 그 전부.”

 

운동장에서 들었던 것과 같은 말이었다. 그것은 예언이라기보다 차라리 책에 적힌 대로의 사실을 읊는 것처럼 보였다. 이미 정해진 미래, 피할 수도 없고 외면할 수도 없는 확정 사항. 어쩌면 잔인하게까지 느껴지는 말이었지만 그 사실을 입에 담는 사람의 표정은 그저 담담하기만 했다.

 

“그냥 생각하지 마, 안 그래도 머리 아픈 일이 넘쳐나는데.”

“아, 니힐같은 사람을 ‘단순하다’고 하는 건가요?”

“뒤질래? 어쨌든 난 먼저 나간다. 주예진 넌 천천히 있다 와, 휴가라고 생각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나가? 장소에 그다지 맞지 않는 어휘에 예진이 의아함을 느끼며 고개를 든 순간, 남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당황스러움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예진과 달리 맞은편 청년의 얼굴은 평온하기만 했다.

 

“음… 저도 나가야겠죠? 이아쿠스랑 같이 쉬다 오면 니힐이 분명히 화낼 텐데.”

“어, 어어…….”

“저도 나름대로 열심히 일했는데요. 이아쿠스에게만 휴가를 주는 건 불공평해요. 가이드도 쉬는데.”

 

투덜거리는 말과 다르게 보랏빛 눈동자는 여전히 무덤덤했다. 그리고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과 동시에 주위의 풍경이 뒤바뀌었다. 눈이 시릴 정도로 새파란 하늘, 그림처럼 흘러가는 뭉게구름, 그 모든 풍경이 비치는 발아래의 수면까지.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녹음도, 숲 바깥의 교정도 없이 펼쳐진 것은 그저 망망대해였다. 끝도 없이 이어진 풍경은 두렵다기보다 숨까지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 달라진 풍경이 신기한지 주변을 둘러보던 청년이 이내 예진에게 시선을 두고서 입을 열었다.

 

“헤르메스가 가이드는 지금 겨울에 있다고 했어요.”

“겨울…?”

“네, 비유적인 표현이라는 건 알았지만 정확하게는 이해하지 못했어요.”

 

청년이 발끝으로 수면을 건들자 그의 주위로 잔잔한 파동이 일었다. 수면에 비친 두 사람의 모습이 잠깐 일렁였다가 곧 다시 제 모습을 갖추었다. 한참을 제자리에 서서 제 모습을 들여다보던 그는 이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이드가 겨울이라면 이아쿠스는 여름에 있는 거군요.”

“그건 여기가 여름이라서야?”

“반대예요. 이아쿠스가 여름에 있기 때문에 이곳이 여름인 게 아닐까요?”

 

이아쿠스의 세계를 보니 헤르메스의 말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덧붙인 그가 말을 이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고저 없이 담담했지만 예진은 어쩐지 그의 눈이 반짝인다고 생각했다.

 

“여름은 복합적인 단상의 집합체예요. 높은 온도와 습도 때문에 불쾌 지수는 높은데, 막상 망막에 맺힌 장면 하나하나는 길게 기억되는 경우가 많아요. 그 경우의 반응은 보통 긍정적이고요.”

“으음……. 조금은 알 것 같아.”

“다른 계절도 마찬가지지만요. 가이드의 겨울도 비슷한 느낌일까요? 허락해주지 않아서 들어가 보지는 못하겠지만.”

 

예진은 문득 보지 못한 그의 겨울이 그리 어둡고 쓸쓸하지만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자신의 여름이 그렇듯, 그의 겨울 또한 추억에 맞물려 있겠지. 누군가와 함께한 기억을 떠올리며 살갗에 닿는 차가운 감촉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달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곳의 여름도 나쁘지 않지만, 나는 이아쿠스의 다른 계절도 궁금해요.”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계절은 결국 바뀌는 것이다. 흘러가는 시간을 따라 풍경 또한 달라지기 마련이고, 지나간 계절은 다시금 찾아올 것이다. 간혹 한 계절이 조금 더 길게 느껴질 수는 있겠지만. ‘어떻게든 시간은 흐른다’던 남자의 말을 떠올리며 예진은 웃었다. 그의 계절은 어디쯤 있을까.

 

“이제 슬슬 나가야지, 지부장님 정말 화낼 거야.”

“이아쿠스는 언제 나올 거예요?”

“나도 곧 나갈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구경하고.”

 

저 혼자는 힘드니까 빨리 나와요. 강조하듯 덧붙인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이내 그의 모습 또한 시야에서 사라졌다.

예진은 비로소 천천히 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이 여름이라면 자신은 분명 그 여름의 끝에 서 있으리라. 열병 같던 첫사랑도, 푸르기만 했던 추억도 전부 지나갔으니까. 이제 정리하고 나아갈 때가 되었다.

 

“……안녕.”

 

누군가에게 보내는 짧은 작별 인사를 내뱉으며, 예진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덥고 습한 공기 가운데 간혹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오래 지나지 않아 그의 모습 또한 수면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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