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로고.png
자산 7.png
키리사메의 방식으로 (1).png
키리사메의 방식으로.png

*

오늘도 더운 날이었어요. 뜨겁고 건조해서 밖에 나가면 녹아버릴 것 같아서, 온종일 집안에 누워있었어요. 음, 아무것도 안 하니까 조금 심심하긴 했는데, 언니랑 벨로스가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그걸 듣고 있었답니다. 언니가 며칠 전에 섬에서 나갔다 왔거든요. 어떤 일인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엄청 바쁜가 봐요. 쉴새없이 사람들을 만난대요. 해야 하는 연구? 가 있는데 이번에 실험? 이 실패해서 사람들이 죄다 휴가?를 반납했다고 하네요. 계획한 물놀이를 할 수 없게 된 사람이 있었다는데, 안타까운 일이에요.

그나저나 이 날씨에 다들 나갈 생각을 하나 본데, 왜 그러는 걸까요. 여름의 자외선은 피부를 상하게 하는데다 뜨거운 공기 아래에 장시간 있으면 열사병의 위험도 있고. 자연에는 시원한 곳이 적어서 길을 걷는 것도 건강을 위한 선택은 아닌 것 같은데... 시원한 곳을 찾는다는 이유로 물에 가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물고기가 아닌 우리들은 땅을 걷는 생명체라고요. 그 말은 당연히 땅을 벗어나면 죽을 수 있다는 것이죠. 곳곳에 위험이 존재하는 계절에, 기온을 견뎌낼 신체도 없으면서 바깥활동을 계획하고 기다리기까지 한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합리적이지 않은 행동인 것 같은데 말이에요? 이게 보편적이고 즐거운 일이라고 해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요. 언니는 이유를 알고 있을까요?


 

*

여름. 일 년 중 가장 더운 3개월. 네 개의 계절 중 두 번째로, 얼어붙은 땅에서 움튼 씨앗이 시작을 알리는 때를 지나 태양이 녹음을 무르익게 하는 계절이며, 인간이 가장 다종다양한 계절나기를 고안해낸 시기이기도 하다. 공식적인 휴가를 이용한 피서가 가장 대표적일까. 그중에서도 사람들은 물로 떠나는 것을 선호한다. 시설을 갖추어둔 수영장부터 자연이 만들어낸 계곡이나 바다까지. 그 차가움에 영혼까지 씻어내어 정화하고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고 싶은 것처럼, 본디 땅을 딛는 것이 숙명인 생명들은 굳이 물에 적합한 도구들을 준비해가며 그곳을 찾아간다.

아그레스 에레우시아는 여름나기나 그를 위한 도구에 그렇게까지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지중해의 섬 출신으로 더위에는 꽤 강한 편이었고, 물- 바다 - 에 때와 상관없이 자주 갔었으며, 또 에레우시아의 내력 때문에 정해진 일을 하지 않는 것 외의 방법으로 휴식을 취한다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특별한 존재였던 언니나 형부가 열심히 설명해주었음에도 왜 그렇게 하는지, 그것이 ‘즐거운’ 행위이며 ‘할 가치가 있는지’ 고민해보았으나 어린 아그레스는 ‘이해할 수 없는 행위’ 로 결론을 내렸었다.

그후 섬을 떠나 인간들과 생활하면서, 인류의 여름나기에 대한 이해를 갖추게 되었을 때도 생각이나 행동에 큰 변화는 없었다. 그렇게까지 기다려지는 것일까? 꼭 저 옷을 입고 일부러 도구며 놀잇감을 준비해야 하는 걸까?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주변의 사람들이 즐거워 보이기에 그들을 모방해보았다. 여름을 기다려보았고, 때맞추어 휴양지를 찾아가기도 했다. 결과적으로는 그냥 신난 사람들을 잔뜩 보고 온 게 전부인 것으로 끝났었지만, 다른 사람들의 여름을 체감한 것이라 받아들이기로 했었던가. 그 풍경에 자신은 존재하지 않는 기분이 들어 일찍 돌아왔던 것이 마지막 기억이다. 그다음에는, 글쎄. 관련하여 유의미한 기억을 만든 적은 없다. 이 모든 행동과 고찰의 흔적들은 4년 전, 섬이 붕괴되고 UGN으로 넘겨져 한 지부로 오기까지, 자기자신의 생존 이슈에 밀려나 잠깐 묻혀 있었다. 우연히도 바다와 가까운 지부에서, 우연히 바다를 가자며 왁자지껄해지기 전까지.


 

*

오래간만에 고민을 한다. 첫 번째, 일년 삼백육십오일 쉴새없이 사건이 밀려드는 지부에서 자리를 비워도 안심이 되는가? 정답은 아니오이다. 두 번째, 반드시 바다로 떠나지 않으면 휴식을 취할 수 없는가? 나의 기준으로는 아니오이다. 세 번째, 나는 그들과 함께 휴식을 기다리며 성심껏 즐거워할 자신이 있는가? 달리 즐거웠던 경험이 없는고로 이것 역시 아니오인 것 같다. 노이만의 이성적인 판단을 거쳐 나는 남아 있을게, 하려고 입을 열면 그들의 들뜬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전까지 일은 대강 끝마쳐둬야겠네요, 힘낼게요! 가서 뭐 할까요? 옷이나 새로 살까나~ 뭐 가져갈지 고민되네요.. 오가는 말들 사이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다투는 소리에, 길고 깊은 한숨 소리도 들린다. 업무의 피로감이 지배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기대감으로 바뀌어 있다. 예전에 보았던 인간들의 모습들과 겹쳐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상하리만치 가깝게 느껴진다. 그것에 놀라워하며 상념에 잠겨 있다가, 당장 이것저것 계획하는 동료들을 바라본다. 수영복부터 살 모양이다. 당연하겠지만, 같은 자리에 있는 나에게도 권유한다.

수영복? 나? .. … .. …

.. .. ..

옷 고르는 데에는 재주가 없네만. 도와준다면 기꺼이.

 

어쩌다보니 날짜가 정해지자마자 나오게 되었다. 밝고 활기찬 도시. 볕이 제법 따가운 걸 보니 3~4일 안으로 더워질 모양이다. 날씨에 굴하지 않는 거리를 그들과 함께 걷는다. 대화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웃음을 주고받는 것이 어색하지 않다. 아니면 오히려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그 사실을 어색하다고 느껴야 하는 걸까? 스스로 이런 문답을 하는 것을 보면, 나는 그들에게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깊이 동조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태생적으로 그들과 동족이 아니라 밝혀졌는데도, 들떠있던 동료들이 멀게 느껴지지 않았던 건 필시 이러하기 때문이리라. 또다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레니게이드 비잉이니까(또는 노이만이니까) 할 법한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고민을 지우고, 수영복을 고르는 데 집중하기로 한다. 저쪽에 진열되어 있는 하늘색 수영복이 신경쓰이는데 가보자고 할까나. 역시 평상복으로 입을 디자인은 아니지만 길거리를 다니기 위해서 입는 옷은 아니니까… 그 옆에 있는 건 다른 사람에게 어울릴지도.

 

오늘은 많은 소비를 하게 될 것이다. 그래도 이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모처럼이니까. 무게가 늘어가는 바구니들을 보며 괜스레 미소짓는다. 아. 지금은 ‘나도’ 이 행위들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걸지도 모른다. 아마도, 어릴 때 이해하지 못했던 건 단순한 지식이 아닌 정보를 처리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전에 아무런 즐거움을 느끼지 못했던 것은 혼자서 모든 것을 경험해보려고 시도했기 때문이었겠지.

이번에는, 그래. 다를지도 모른다. 굳이 골라 말하자면 기다려지는 것 같다.

… 정말 바구니가 무거워졌는데, 바다에 가기로 한 날이 일주일도 넘게 남은 건 차치해둘까.

메인 백그라운드.png
키리사메의 방식으로 (3).png
키리사메의 방식으로 (2).png
페이지 하단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