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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거 워닝 :: 집단 따돌림

 

 

C시의 옆 도시 지부와 함께한 회의에는 지부장인 이반뿐만 아니라 같은 팀인 5명 또한 C시 지부의 에이전트 대표들로 참여했다. 아침부터 시작된 회의는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 끝이 났다. 지부장끼리 서로 짧은 담소를 나누는 동안 나머지 사람들이 회의장을 우르르 빠져 나갔다. 

“야, 배고프다. 여기는 뭐가 맛있대냐?” 
“잠시만요~, 찾아볼게요~.” 

히카루가 핸드폰을 붙들고 열심히 맛집을 검색하는 사이로 크라드가 화면을 같이 보기 위해 고개를 기울였다. 두 사람이 작은 화면을 보며 여러 식당을 재보는 동안, 라일락이 슬쩍 옆으로 빠져나왔다. 회의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은 탓에 입안이 텁텁했다. 뭐라도 마시고 싶었다. 회의실에 오는 동안 휴게실 쪽에서 언뜻 보았던 자판기가 절실했다. 

“저 음료수 사 올 건데 마실 거죠? 다녀올게요~.”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듣지도 않은 채 통통 튀는 발걸음으로 라일락이 휴게실을 향해 걸었다. 뭘 좋아하는지는 모르지만, 대충 캔 녹차면 되지 않을까? 쌍화차 같은 걸 사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 보고 싶기도 했다. 나는 맛있는 걸로 먹어야지. 톡 쏘는 탄산음료가 마시고 싶었다. 가볍게 복도를 돌아서 휴게실에 막 발을 내딛으려던 라일락의 귀에 낯선 목소리가 꽂혔다. 

“…C시에서 온 사람들 봤어?” 
“봤어, 봤어! 슬쩍 본 거긴 한데….” 

순간 걸음을 물리고 옆에 있는 벽 뒤로 몸을 숨겼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숨는 게 스스로도 웃기긴 했다. 뒷말을 하고 있는 건 저쪽이었는데도. 남의 눈치라고는 조금도 보지 않는 라일락이었지만, 타 지부에서 소란을 일으키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무슨 일이 생기면 곤란해지는 건 자신이 아니라 동료들이라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어쩔까. 다른 데에 갔다가 이 사람들이 가고 나면 다시 올까? 라일락이 궁리하는 사이에도 대화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어쩐지 분위기가 대단하던데~.” 
“그치만… 엄청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라는 소문도 있어. 나도 잘은 모르지만….” 

잘 모르면 말하지를 말지. 옆 도시라고 기껏 와줬더니 남의 뒷담이나 까고. 라일락은 폭발하려는 감정을 꾹꾹 눌러 담았다. 자신은 이반처럼 말재주가 좋지도, 재환처럼 사회생활을 많이 해본 것도, 현랑처럼 거대한 위압감을 주지도, 크라드처럼 은밀하게 일을 처리하지도, 히카루처럼 능청스럽지도 못해서. 

“근데, 그 사람 다른 사람이랑 있을 때 성격이 너무 다르지 않아? 그 왜, 보라색 머리인 ….” 
“아… 라일락이라고 했던가?” 

이제 라일락은 어디 한 번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나 보자 하는 심정으로 듣고 있었다. 아니, 역시 참지 말고 지금 당장 달려 나가서 다시는 입을 못 놀리게 혀를 뽑아놓을까? 

“자기 지부 사람들이랑 있을 때는 엄청 활발하던데, 혼자 있을 땐 말 한마디도 안 하고….” 
“나 사실 그 사람 이야기 들은 적 있어. 이거 다른 사람들한테 말하면 안 돼. 나도 전해 들은 거야. 솔라리스랑 우로보로스의 크로스 브리드라고 했던가? 만들어낸 독성 물질로 같은 지부 사람들을 전부 중독시켰대.” 
“뭐, 진짜? 지금 지부?” 
“아니, 예전엔 다른 지부에 있었대. 모두 무사하긴 했는데… 그 지부 에이전트들이 앞으로 같이 못 있겠다고 했나 봐.” 

라일락은 작게 숨을 들이켰다. 기억에 묻어두었던 옛날 일이 떠오르자 넘실거리던 감정이 가라앉았다. 반박할 생각도 들지 않고, 화를 내고 싶지도 않았다. 오히려 차분해졌다. 이런 사람들의 뒷말은 익숙했다. 굳이 반응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가만히 듣고 무시하다가, 그런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벗어나면 그만이었다. 그러니 그냥 가버리면 되는데. 발이 땅에 붙기라도 한 듯이 움직이질 않았다. 

“지금이야 자유자재로 활용한다고는 하지만, 솔직히 무섭잖아? 언제 다시 그럴 줄 알고….” 
“정말! 나 같아도 같이 있기 싫을 것 같아. 중독시킨다니….” 
“FH가 아니냐는 말도 우스갯소리로 돌았었대. 일부러 그런 거 아니냐고.” 

일부러 그랬던 걸까? 라일락은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했다. 

*

그날은 라일락이 막 각성했을 때였다. 갑작스럽게 몸 안에서 끓어오르는 무언가로 인해 혼란스러움과 약간의 고양감을 느끼고 있을 때쯤 UGN에 발견됐다. 라일락은 일정하게 거주하는 곳 없이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UGN에서 지원하는 기숙사에 들어가게 됐다.

당시에 머무르고 있던 도시의 지부는 도시 자체가 작았던 탓인지 규모가 매우 작았다. 그럼에도 UGN이라는 건 변하지 않아서, 라일락은 그곳에서 오버드에 대한 교육과 능력의 활용법, 일상과 이어지는 인연의 중요성 등을 배웠다. 

처음으로 생긴 일정한 거주지, 누군가에게 보호받는다는 낯설지만 간지러운 감각, 자신을 어색해하면서도 다정하게 대해주려고 노력하는 지부의 에이전트들과 따뜻하게 맞아주던 지부장. 라일락은 그 모든 것이 이상하다고 느껴졌다. 자신의 손 위로 쏟아질 것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손에 닿은 온기가 따뜻했고, 너무도 달콤해서, 쉽게 받아들였다. 라일락은 지금보다 더 어렸고 미숙했기 때문에. 

일상을 이어주는 인연이라면 이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 사람들도 당연히 자신을 받아주리라 믿었다. 이미 나를 받아줬는걸. 봐, 내 이름을 불러주잖아. 나를 봐주잖아. 이 사람들은 나와 계속 함께 해줄 거야. 

사건은 언제나 온건한 평화의 틈 속에서 일어난다. 라일락은 같은 솔라리스 신드롬을 가진 에이전트의 지도하에 여러 물질을 생성하는 연습을 했다. 그리고 라일락은 자신이 다양한 독성 물질을 만들어내고 해독하는 데에 재능이 있음을 깨달았다. 칭찬받고 싶었다. 나도 이렇게 잘 만들 수 있어. 이걸로 모두를 괴롭히는 걸 죽여버릴 수도 있어! 기대감이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아도 에이전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겁에 질렸던 것 같다. 왜? 독성 물질이 무서워서? 같은 솔라리스면서. 

다시 말하지만, 라일락은 지금보다 더 어렸다. 그것이 모든 일의 면죄부가 될 수는 없지만, 행동을 하는 데에 있어 미숙한 판단을 내렸던 이유가 될 수는 있다. 칭찬해주지 않으면 칭찬해줄 때까지 하면 돼. 이건 아니야? 그럼 이거는? 이건? 이렇게 많이 만들 수도, 다양하게 만들 수도 있는데? 

끊임없이 늘어나는 독성 물질에 에이전트가 소리를 질렀다. 맹독을 머금은 보랏빛 연기가 퍼져나갔다. 소리를 지르던 것이 잠잠해지고 털썩, 쓰러지는 소리가 났을 때가 되어서야 라일락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눈치챘다. 황급히 연기를 거두었지만 이미 공기 중에 퍼진 것을 회수하기는 어려웠다. 작은 지부에 퍼진 독은 천천히 모두를 침식해나갔다. 

자신이 중독시킨 에이전트를 멍하니 내려다보던 라일락이 정신을 차린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아냐, 괜찮아. 잠깐 저지를 수 있는 실수였어. 내가 다시 해독하면 돼. 그러면 다들 일어날 거고, 실수했다고 사과하면 괜찮다고 해줄 거야. 좀처럼 집중이 되지 않아 해독제를 만들어 내는 데엔 잠시 허둥거렸지만, 라일락은 성공했다. 깨어난 지부장에게 잔소리를 듣고 나서야 지부 단체 중독 사건은 그렇게 작은 해프닝으로 마무리되는 듯싶었다. 

그때부터였다. 에이전트 및 칠드런들이 라일락을 조금씩 피하기 시작하던 건. 라일락이 보일라치면 반대쪽으로 걸어가고, 말을 걸려고 해도 바쁘다며 사라지기 일쑤였다. 그것에 굴하지 않고 꾸준히 달라붙었던 라일락이 지부장실에서 들려오는 대화를 들은 건 우연이었다. 

“지부장, 그 애는 위험해요! 정말 위험한 물질을 만든다고요.” 
“하지만 해독시켜준 것도 그 애잖아.” 
“먼저 중독 시켰으니 그건 당연한 일이에요! 더 무서운 게 뭔지 아세요? 그걸 맨정신으로 했다는 거예요. 충동에 의한 것도 아니고요! 일부러 그런 거라고요!” 
“그렇다고 해도….” 
“아무튼 저희는 같이 못 있어요. 이건 모두의 의견을 대표해서 말하는 거예요. 벌써 전부 이야기했다고요. 눈치도 없어서 다들 피하는 것도 모르고….” 

지부장실 앞에 몇 초간 가만히 서 있던 라일락은 몸을 돌려 반대편으로 뛰어갔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 자리에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덮쳐왔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다들 잠깐 화가 난 거니까, 시간이 지나면 풀릴 거라고. 지부장으로부터 다른 지부로 옮겨가야 한다는 말을 듣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버려진 거구나. 다들 날 두려워해서. 내가 다시 그럴 거라고 생각해서. 일부러 그랬다고 생각해서…. 그 사실만이 벼락같이 온몸에 꽂혔다. 싫다고 버티고 싶었다. 왜 그래야 하느냐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변하지 않는 현실이 자신을 짓눌러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라일락이 짐을 챙겨 기숙사를 떠나는 날에 마중을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라일락은 그렇게 C시로 이동했다. 

*

그 사람들도 분명 뒤에서 내 얘기를 많이 했겠지. 그런 걸 생각하면 전혀 모르는 이들의 뒷말은 아무렇지도 않다. 소문이 와전되고, 그러한 과정에서 자신이 극악무도한 짓을 벌인 이가 되더라도. 

“근데 정말 그게 사실이라면 FH가 더 잘 어울리긴 하지?” 
“C시 지부 사람들도 불쌍하다. 라일락이라는 사람이 그랬던 거 알고 있는 걸까?”
“모르는 거 아니야?” 

이제 됐다. 마음대로 말하게 놔두고 돌아가자. 음료수는 뽑지 못했지만 둘러대려면 대충 둘러댈 수 있으니까. 벽에 기대고 있던 몸을 떼어낸 라일락 옆으로 검은 인영이 스쳐 지나갔다. 

“거, 재미있는 이야기 하시나 본데 저희도 좀 같이 들읍시다?” 
“우와, 선배, 이게 뒷담이라는 거죠? 저 이렇게 뒷담 까는 거 처음 들어봐요~.” 

익숙한 목소리였다. 휴게실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방금까지 이야기하고 있던 사람들이 당황하는 게 보였다.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냐. 앞에선 말도 못 하면서 뒤에서 나불나불…. 이 지부에서는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입만 놀리라고 가르치나.” 

그리고 그 익숙한 목소리는 명백히 노여움을 담고 있었다. 라일락이 눈을 동그랗게 뜨는 사이에 어깨에 커다란 손이 얹어지고, 넓은 품 안으로 몸이 당겨졌다. 

“그, 그치만 사실이잖아요! 저희는 그냥 걱정돼서…!” 
“정말 걱정이 되셨다면 이런 식으로 뒤에서 말씀하실 게 아니라 지부장인 제게 따로 언질을 주셨어야 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건 저희 지부원을 깎아내리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는군요. 그리고 사실이라고 하셨습니까? 그 자리에 직접 있으셨던 것도, 본인에게 직접 이야기를 들으신 것도, 따로 조사를 하신 것 같지도 않은데 어떻게 사실이라고 판단하십니까? 만약 정말 있던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걸 모르고 받아주었을 거라 생각할 정도로 저희 지부가 안일하다고 생각하셨습니까? 어쩌면 오해가 있었고, 사실관계 파악을 명확히 했기 때문에 받았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하십니까? 아, 거기까지 사고가 닿지 않는다면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만….” 

차분하고 신뢰감 있는 목소리가 이어진다. 조금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정갈하게 정리된 말로 얻어맞은 두 사람은 아무 말도 못 하다가, 결국 휴게실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리고 바닥에서부터 기어 나온 그림자 손에 발목이 붙들려 그대로 넘어졌다.

엉거주춤 일어나 다시 도망가는 사람을 바라보며 라일락이 한숨을 쉬었다. 품에 기대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종알거렸다. 

“음료수 못 샀어요. 목말랐는데.” 
“지금 그게 중요해? 너는 인마, 평소에는 사고 잘 치면서 저걸 왜 들어주고 있어?” 
“아니, 뭐… 익숙하기도 하고….” 
“익숙해지면 안 됩니다. 분노하세요. 저희가 함께 싸워드리지 않습니까.” 
“맞아요. 감히 선배의 뒷담을 까다니. 현랑 선배한테 맞아도 할 말 없다고요!” 
“이제 안 참아도 됩니까?” 
“아니, 현랑 선배가 나서면 일이 커집니다….” 

버려지는 건 싫다. 버려질 바에는 아무것도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그 결심이 무너진 건 이 사람들과 만나고 나서였다. 그렇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붙잡자. 나를 버릴 바에는 어떤 형태로든 내 곁에 있게 하자. 부풀어가는 욕망을 잠재운 것도 그들이었다. 

막연한 불안감에 신뢰를 준다. 옆에서 걷겠노라 말한다. 부당한 일을 당한다면 분노할 것이며, 슬픈 일이 생기면 눈물을 흘리고, 기쁜 일에는 함께 웃어줄 것이다. 어긋난 방식으로 붙잡지 않아도 곁에 있겠다고. 때로 잘못된 길에 들어서면 다시금 옳은 길로 이끌어줄 사람들. 라일락은 이들이 좋았다. 

순식간에 왁자지껄해진 주변이 안정감을 준다. 방금까지 들었던 싫은 소리가 모두 저 너머로 사라질 만큼. 라일락은 웃음을 터트렸다. 이 사람들이 있으면 충분해. 앞으로도 계속 함께야.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러니 사라지지 않기를. 당신들의 일상을 엮고 비일상을 이어서, 계속해서 함께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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