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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롱한 붉음.

미약한 달빛에도 산란하는 붉은 빛줄기에 마토바 사요는 즐거운 듯 웃어버렸다. 아, 떨어져나온 조각이 이다지도 생명력 넘칠 수 있을까. 살아움직이는 것처럼. 손가락 사이에서 발버둥치는 것처럼 공명하는 레니게이드의 파동에 마토바 사요는 집요한 허기를 느꼈다. 한낱 인간이, 오버드가 이 조각을 삼켜버리면 어떻게 될까. 풀 죽어있던 욕망이 고개를 빳빳하게 든다. 먹으라! 머릿속을, 위장을 울리는 그 고요한 외침.

 

“어쩌면 말이죠. 저와 당신. 연결될 지도 몰라요. 어머, 어머! 그럼 이제 전 당신의 가족이 되는 걸까요?” 불어닥치는 돌풍이 코앞까지 닿았다. 마토바 사요는 그 순간에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리고 칼끝이 닿기도 전에…….

 

꿀꺽.

 

씹어냈던 붉은 조각이, 현자의 돌 일부가 한낱 인간에게 ‘먹혔다’. 식감? 맛? 그런 걸 느낄 틈은 없었다. 마토바 사요의 진미는 삼켜낸 돌에 있지 않았으니.

 

“내, 조각을, 삼켰다,고 네가……!” 악의 심장을 향해 내질렀던 검은 어느덧 힘없이 늘어졌다. 정의의 검이 단 한 번의 결정으로 갈 길을 잃었다. 용자 제피리온 그 불쾌함에 이를 악물었다. 순간적으로 동조한 레니게이드의 파동이 마토바 사요라는 인간의 존재를 재정의하고 있었다. 최악이다, 최악이다, 최악이다!

“최악인가? 전……너무 좋은데. 이왕 이렇게 된 거 받아들이고, 다정하게 사요라고 불러주세요. 당신에게 그렇게 불린다면 더 기분 좋아질 것 같거든요, 제피리온.”

“웃기지 마라! 내 사명을 이어가지 않을 존재가 그걸 가질 자격은 없다!”

“어머, 막내딸 상처 입어요. 가출해야겠네요, 휴―.”

“……가라.”

 

속이 쓰린다 해도 제피리온에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직전의 싸움에서 입은 부상은 아직 회복도 되지 않았을뿐더러, 아른아른 자신의 것과 겹쳐보이는 저 레니게이드의 미묘한 파동은 더더욱 제피리온의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었더. 악이, 자신의 정의를 계승한다. 아니, 그럴리 없을 터!

 

“제피리온.”

“…….”

“당신이 외면하려고 해도, 모르는 척 한다 해도, 끝까지 부정해도 결국 인정하게 될 거예요. 제 직감은 그리 말하고 있답니다?”

“그건 알 수 없지만. ……만약 그걸 사용한다면, 그 끝은 각오해야 할 것이다.”

“후후, 그럼요. 제 각오가 무엇을 이겨낼지……당신 앞에서 보여드리고 싶네요.”

 

쪽. 마토바 사요는 검붉은 피로 얼룩진 손바닥 안쪽에 입을 맞추는 시늉을 하고는 애정을 듬뿍담은 손키스를 제피리온에게 날렸다. 이뤄 말할 수 없는 불쾌감, 불편함, 속을 울렁거리게 만드는 그, 지독한 피냄새.

마토바 사요는 춤추는 듯한 걸음걸이로 용자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아주 많은 것을 뒤엎고, 가장 중요한 것을 먹어버린 채로.

 

 

✨✨✨

 

 

처음은 소나기였다. 여린 빗줄기가 후두둑, 떨어지다 눈을 몇 번 깜빡이는 사이 그치기를 새벽내리 반복했다. 제피리온은 그때마다 어두컴컴한 하늘을 곁눈질 했다. 인간들은 이럴 때……애간장을 태운다고 했던가? 아니, 아니, 그보다 더 어울리는 말이 있었는데. 제피리온은 머릿속에서 타니 슈세이의 쾌활한 웃음과 그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농담들을 더듬거렸다. 그러니까,

…….

팟. 제피리온의 헤드라이트가 갑작스레 켜지더니 주차장을 밝혔다. 텅 비어있는 주차장은 쏟아지는 빗줄기 덕분인지 더욱더 스산해져 있었다. 똑똑. 헤드라이트의 사람의 눈동자였다면 빙그르르, 한 바퀴 돌아서 옆으로 향했을 것이다.

 

“제피―”

“……너!”

 

이거 참, 반갑지도 않은 손님의 등장이다.

제아무리 축축하게 젖은 비냄새가 주차장의 아스팔트를 차지했다고 해도 지리멸렬하게 퍼져있는 피 비린내는 채 가리지 못했다. 후후, 붉은 여자는 작게 웃는 소리를 냈다. 평범한 사람이 이 광경을 봤더라면 레니게이드 비잉이 하나 태어났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이름하야 오리진: 레전드의 ‘주차장의 살인귀’라든가.

똑똑. 다시금 제피리온의 차창을 두들기는 소리가 울렸다. 그게 신호탄이 됐는지는 몰라도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더니 이제는 억수같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 무슨 공포 영화의 도입부인가! 그리고 이게 도입부가 맞다면 영화의 주인공은 늘 문을 열었다.

지금처럼.

 

“아, 고마워요! 덕분에 살았네요, 제피~”

“너, 그 피는…….”

“응? 전부 제 피랍니다. 걱정말아요!”

“…….”

“여기 수건 같은 건 없나요?”

“……뒷좌석에 슈세이 군이 놓고간 게 있다만.”

“찾았다!”

 

붉은 여자. 아니, 마토바 사요는 언제 그랬냐는 듯 제 몸에 묻은 피를 ‘슈세이 군’의 수건으로 북북 닦아내고는 손을 내렸다. 그렇다고 냄새가 다 빠진 건 아니지만, 한결 나아졌다는 얼굴로 푸우―숨을 내셨다.

 

“너,……너는 대체. 왜 또 여길!”

“요즘 들어 안 왔잖아요? 보고 싶을 거 같아서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너는…!” 제피리온의 헤드라이트가 요란하게 흔들렸다.

“후후, 농담도 못 하나요? 비가 몰려들 것 같았거든요. 비 피할 곳을 찾아왔죠.”

“……넌 날 가게 천막으로 쓰는군.”

“뭐어, 틀린 말은 아니네요!”

“하아아…….”

 

차내 라디오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마토바 사요는 그게 무엇이 좋은지 까르르 웃고는 운전석과 조수석에 걸쳐 누웠다. 젖은 머리에서 뚝, 뚝, 물방울이 떨어져 나와 제피리온의 카시트를 흥건하게 적시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누우면 안되는…….”

“네에, 뭐라구요? 빗소리 때문에 잘 안 들리네요, 용자――”

“하아아아아…….” 아까보다 한숨 소리가 길어지지는 않았나? 착각은 아닐 것이다. 라디오 주파수가 어긋난 것처럼 아주, 아주, 길게 늘어졌으니.

 

“비가 그치면 돌아가라, 마토바 사요.”

“그때까지는 여기 있어도 된다는 얘기인가요?”

 

제피리온은 대답 대신 히터를 틀었다. 습한 공기는 밖으로 빠져나가고, 이제는 따뜻한 바람이 차내를 채우고 있었다. 마토사 사요는 쿡쿡, 웃음을 참으면서 몸을 돌려 누웠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집에도 데려다주세요, 제피~”

“비가 그치면 알아서 갈 수 있지 않나.”

“뭐어, 그렇지만. 외곽까지 걸어가긴 귀찮은 걸요?”

“……그럼 외곽에 내려주지.”

“………아하하! 그래요, 봐줄게요. 으음―드라이브네요, 제피.”

 

계기판의 불빛이 깜빡였다. 걸린 듯, 안 걸린 듯 조용하기만 했던 시동음이 점점 커지더니 제피리온은 주차장의 입구로 바퀴를 굴렸다. 마토바 사요는 마치 추임새처럼 ‘우리들의 추억의 주차장을 빠져나가요―’ 하고 중얼거렸다.

추억의 주차장.

애초에 그렇게 다정다감한 호칭이 붙을 만한 곳도, 관계도 아니다. 이곳은 제피리온에게 있어서 아지트였다. 따지자면 침실이었지. 흐릿해진 주차선을 따라서 차체를 세우고 UGN 에이전트나 지부장들의 발걸음이 이어지던 곳.

그러나 마토바 사요가 자신의 현자의 돌 일부를 먹은 뒤로는 공기를 뒤숭숭하게 만들었다. 초창기에는, 그래. 죽고 못 사는 만큼 검을 겨누었지만, 그게 답이 되지는 않았다. 그 누가 ‘자기자신’을 죽일 수 있는가. 물론 제피리온은 마음속 깊이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다만, 만사라는 게 전부 인정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자신은 그를 막을 수 없다. 그 문장이 계기판의 숫자 대신 빛날 때가 있었다.

 

“그런데 제피.”

“뭐지?”

“언제까지 ‘마토바 사요’하고 부를 건가요?” 마토바 사요는 근엄한 척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 손가락 끝은 제피리온의 핸들을 더듬거렸다. 쿡, 쿡, 찌르기도 하고.

“…….”

“사요―하고 불러줄 때도 됐잖아요. 그쵸?”

“……싫다.”

“아아, 정말이지.” 반응은 이래도 제피리온의 대답을 예상한 듯 마토바 사요는 눈을 감고는 즐거운 듯 미소를 지었다. 이건, 그래. 마토바 사요가 제피리온과 만나면 늘 하는 얘기였다. 다정하게 ‘사요’라고 불러줄 때도 됐다고.

제피리온은 세상이 두쪽나더라도 그 말에는 항상 부정했다. 타니 슈세이에게 들은 요비스테呼び捨て의 의미라든가의 이유도 있지만, 가장 확실한 건 그 이유였다. 거리감. 이 이상 거리감이 좁혀지면 안 된다는 이유였다. 굳이 입에 올리지 않는 말이었지만, 마토바 사요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현자의 돌이 서로를 잇는 순간부터.

 

제피리온은 외곽으로 나가기 위해서 해안 도로를 탔다. 비와 바다 짠 내가 뒤섞여 도로를 물들였다. 이쯤되면 청량한 푸름이 눈동자를 채워야 했겠지만, 날씨가 꾸리꾸리해서인지 온통 흐리멍텅한 푸름이었다. 부서지는 파도도, 떠오르는 태양을 가린 먹구름도, 젖어버린 도로도.

 

“제피!”

“……안 된다!”

“저 아직, 아무 말 안 했는데요?”

“스, 습관처럼.”

“어쨌든 멈춰 봐요!”

 

열어주지 않아도 문을 열고 나가버릴 것 같은 모양새에 제피리온은 왜? 하는 이유도 묻지 못하고 속도를 늦췄다. 마토바 사요는 기다렸다는 얼굴로 몸을 훽, 돌려서는 뒷좌석에 있던 3단 우산을 들고는 문을 열어재꼈다.

 

“그건……!!!”

“네에, 슈-세-이-군의 우산!”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척척이다. 마토바 사요는 제 우산인 마냥 빙글, 빙글 돌리고는 어디론가로 향했다. 아, 저 조명빛은……. 도로 중간 즈음에 설치되어 있는 무인 편의점이었다. 급하게 먹고 싶은 거라도 생겼나? 아니, 근데……돈은 있나? 있어도 낼 만큼의 양심이 있던가? 핑핑, 머리가 돌아가고 있었다. 가능성이 너무 낮다!

운전석의 문이 허겁지겁 열렸다. 하나 있었던 우산을 누가 들고 가는 바람에 몇 분만 있으면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되어버리겠지만, 어쩌겠는가.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제피리온은 타니 슈세이처럼 외투를 여미고는 무인 편의점을 향해 뛰었다. 딸랑, 코앞에서 들린 방울 소리에 저도 모르게 유리창 너머를 바라봤다. ……깨끗하다. 사고 한 점 치지 않은 것처럼. 그럴 리가 없는데.

 

“어머, 감기 걸려요?” 마토바 사요는 우산을 펼치면서 편의점 계단을 밟았다. 한 칸, 두 칸, 세 칸, 마지막. 작은 우산이 앞으로 살짝 기울었다. 제피리온은 그가 품에 안고 있는 아이스크림 두 개를 쳐다봤다. 그러니까, 마토바 사요가 제 값을 치루고 사왔다, 이 말이다!

“너, 너, 돈은 제대로 낸 거겠지.”

“네에? 냈죠, 냈어요. 그거 때문에 이렇게 뛰어왔나요? 바보네요!”

“……다행이군.” 이래서 평소 행실이 중요한 것이라고 타니 슈세이가 누누이 말한 것이구나. 제피리온은 저도 모르게 이해해버렸다.

“의심 받아서 슬프네요――. 자, 이건 제피 몫이에요.”

 

바닐라 아이스크림. 그것도 콘이다. 대뜸 내밀어진 아이스크림에도 이상한 짓을 하지는 않았을지, 의심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제피리온은 무안한 얼굴로 받았다. 그래, 마토바 사요가 제멋대로이긴 해도 매일같이 사고를 치는 건 아니구나.

둘은 편의점에서 몇 발자국 멀어졌다.

 

“응? 비가 그치네요.” 마토바 사요는 우산을 스르륵, 접으면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까보다는 먹구름이 사라진 것 같기도 한 묘하게 청명한 하늘이 엿보였다.

“흠. 오래 내리더니 이제는 그칠 때가 됐다는 거군.”

“운이 좋네요~ 그래도 외곽까지 데려다 주는 건 약속이라는 거 잊지마세요!”

“……그래, 데려다 주겠다고 했으니.”

 

딸랑, 등 너머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당신!!!”

“핫.”

 

마토바 사요는 그대로 제피리온의 손목을 잡고는 앞으로 뛰었다. 갑자기 무게 중심이 기울어져, 제피리온의 몸은 휘청였지만 금방 균형을 잡았다. 누가 오버드 아니랄까봐! 아니, 근데, 그거 보다.

 

“당신, 내 돈 돌려줘!!!” 뒤따르는 절규같은 목소리에 제피리온이 헛, 고개를 돌렸다. 미치겠군. 불안이 어쩐지 가시지 않는다 했더니. 불안이 아니라, ‘거짓말’이었다. 헐레벌떡 뛰어오는 남자와 눈이 마주친 제피리온은 마토바 사요를 노려봤다.

“……너, 너어, 너! 아까 제대로 냈다고 했잖나!!!”

“으응? 그랬나요? 전 냈다고 했죠――‘제대로’라고는 한 적 없는데요?”

“마토바 사요……!!!”

 

바닐라 아이스크림. 어디 맛을 볼 틈이 있겠는가! 제피리온의 고난은 코앞에 있었다. 사소한 장난, 혹은 사소한 악행. 그런 작은 것에도 저렇게 즐겁다는 듯 웃고 있는 저 여자에게.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을 타고 살랑살랑 흔들렸다. 비내음, 바다의 짠 내,

그리고 고요하게 파동치는 현자의 돌의 두근거림이 그 끝에서 아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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